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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ug 07. 2021

옥수수와의 한 판 승부

나는 내 아이의 유일한 엄마 코치입니다


입이 짧고 먹는 것에 흥미가 없어서 밥 먹일 때마다 전쟁인 아이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침식사로 옥수수를 먹겠다고 제 입으로 먼저 말했다.


'이게 웬 떡이냐' 신이 나서, 미리 삶아 냉동실에 얼려 둔 옥수수 반 개를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예쁜 색감을 위해 체리까지 곁들여 식탁을 차렸다.


한참 있다가 아이가 "다 먹었어!" 하면서 소파로 와서 벌렁 드러눕길래 식탁에 가보니 옥수수 알갱이들이 1/3쯤 몸통에 다다닥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나도 모르게 슬쩍 한숨이 나왔다. 아이는 음식을 남기는 일이 잦은데, 그러면서 죄책감이 1도 없어 보이는 게 영 걱정스럽다.


너무 풍족하게 기르고 있는 게 아닐까? 이래 가지고 커서 자기 살림을 알뜰히 꾸려갈 수 있겠어? 사회생활하면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을 텐데... 순식간에 온갖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또 주절주절 잔소리. "소망아, 음식 남기는 버릇하면 못 써. 세상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이렇게 남기면 농부 아저씨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 아무리 말해도 아이에게는 한 귀로 들어가 다른 귀로 나오는 게 뻔히 보인다. 휴우...


잠깐 멈춰서 각종 훈육책에서 배운 원칙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집안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아이에게 익히게 하라고 했지. 아이가 반항할 땐 '이게 우리 집 규칙이야'라고 제시해 주라고. 그럼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게 우리 집 규칙이야'라고 말해볼까?


하지만 그닥 내키지 않는다. 일단 집안의 규칙이란 가족 구성원 모두, 아니면 적어도 양육자들끼리의 합의가 있어야 정해지는 것인데, 아이 아빠 또한 입이 짧고 음식 남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다. 남편이 동의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못하는 것을 집안의 규칙으로 정할 수는 없지. 잘못하다간 기존에 세운 다른 규칙들마저 강제력을 잃게 된다.


다른 상황들, 예를 들면 일찍 자는 것은 아이와 성인을 차별해서 정할 수 있지만(아이는 아빠만 늦게까지 놀고 자신은 10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것이 불만인데, '너는 성장기에 있는 아이니까'라는 말로 설득한다), 음식을 남기는 건 '어른은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하는 수 없이 이 방법은 패스.



다음에는 코칭에서 배운 것 중 써먹을 게 있나 살펴보다가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망아, 옥수수 왜 마저 안 먹어?"

"배불러."

"한 입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더 먹는다고 배부를 것 같지 않은데."

"엄마는 안 그래도, 나는 배부를 수 있잖아."

"그래, 그럴 수 있지. 소망이는 배불러서 그만 먹고 싶구나." (짜식, 갈수록 말로는 못 당하겠단 말이야.)

"응."

"근데 그냥 버리면 아까운데,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잠깐 침묵. 아이는 사실 남은 옥수수가 아깝지 않다. 언제나 먹을  풍족하고, 부모는 못 먹여서 안달이다. 버려도 또 생기니 남은 음식의 활용법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코칭으로 비유하면 문제 해결의 의지가 없는 상태.


하지만 "그게 왜 아까워? 버려도 돼."라고 말하지는 못할 만큼의 도덕률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대답할 말이 궁하다. 생각하기도 귀찮은데 엄마가 자꾸 질문을 하면서 자기를 놓아주지 않는 상황이랄까.


"엄마한테 좋은 생각이 났어. 버리면 아까운데, 소망이가 지금 먹기에는 너무 배부르잖아. 그러니까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간식 전에 먹으면 어떨까? 그때는 배가 안 부를 거 아냐."


이 질문은 사실 '남은 옥수수를 먹지 않으면 간식은 없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ㅋ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인 "다 먹었어!"를 외치며 소파에 드러눕는 폼이 곧이어 "간식 먹어도 돼?"라고 할 게 뻔해 보여서 승부수를 던져보았다.


칭 프로세스와는 거리가 멀지만 "당장 먹어! 그때까지는 간식 없어!"라고 지시하면서 엄포를 놓지 않는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귀찮은 문답을 거치면서 적어도 '엄마는 음식을 버리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메시지는 받아들일 것이다.


아이는 이 말을 듣더니 "한 입 남은 거지?" 하고 소파 위에서 벌떡 일어나 식탁으로 가서 옥수수를 입에 물었다. 다 먹고 나서는 "엄마, 나 간식 먹어도 돼?"라며 막대사탕을 꺼내온다.


방금 전까지 배부르다고 투정한 것이 멋쩍었는지 "엄마, 나는 밥 배랑 간식 배랑 따로 있더라."라고 배시시 웃으며. 그래 알아, 엄마도 그렇거든. ㅋㅋㅋ



[참고]

따뜻하고 단단한 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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