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평소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하여 온도 차이가 컸다. 나는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남편은 무조건 못하게 할 게 아니라 조금씩 절제하면서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대해 다시 나는, 그것을 가르쳐 주는 시기가 적어도 8세는 아니라고(18세면 몰라도) 맞받아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잠시 외출한 틈에 남편이 집에 굴러다니던 스마트폰 공기계에 게임을 다운받아서 아이에게 주었다. 나에게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집에 돌아온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소리를 치며 남편을 내쫓던, 내가 나가던 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코로나 시국에 집에만 처박혀 있는데 애한테 스마트폰을 주면 어쩌자는 거야. 남편은 반대로 집에만 처박혀 있는 아이가 가여워서 준 것이었겠지만.
하지만 화를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부부싸움이 일어날 게 불 보듯 뻔하고, 아이는 그 사이에서 눈치 보면서 주눅이 들 것이다. 그런다고 이미 받은 스마트폰을 순순히 내놓고 싶지도 않을 것이고, 어쩌면 스마트폰 게임이 아이에게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무렵 코칭수업에서 배운 '생각 바꾸기'를 적용해 보기로 했다.
1. 화가 났을 때 내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던 생각
게임은 아이에게 해롭다.
8세 남자아이는 게임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부모라면 당연히 게임 같이 해로운 것에서 아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남편은 아이에게 게임이 깔린 스마트폰을 주기 전에 나와 상의했어야 한다.
남편과 내가 양육에 대한 의견이 다를 때 최종 결정은 주양육자인 내가 해야 한다.
2. 그 믿음은 언제,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나
스마트폰은 해롭다는 신문기사들, 육아전문가들의 동영상
아들들은 게임 때문에 속을 썩인다는 주위 엄마들의 말들, 인터넷 글들
엄마의 결정으로 게임을 금지하고, 아빠가 협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위 가정들
아이와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어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끊임없이 양육에 대해 공부하는 내가 남편보다 옳을 것이라는 생각
3. 그 믿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어떤 점이 좋을까
아이가 스마트폰 게임하는 것에 예민하게 굴거나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아이가 스스로 게임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는 엄마로부터 신뢰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남편이 나를 무시해서 나 없을 때 상의 없이 스마트폰을 주었다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남편을 신뢰할 만한 양육의 파트너로 보고 아이의 문제를 의논할 수 있다. 내가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은근히 남편의 말을 무시하는 태도를 바꾸어서 남편과의 관계도 더 좋아질 수 있다.
4. 만약 그 믿음이 없다면 상대/상황이 어떻게 보일까
남편은 아이를 즐겁게 해 주고 싶고, 함께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구나
둘이 게임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이 시간에 나도 좀 쉴 수 있구나
5. 그 문장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기
아이가 스마트폰 게임을 할 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빠져드는지 잘 살펴봐야겠구나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아이에게 절제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겠구나
어떻게 하면 절제를 가르쳐줄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보거나 남편과 의논해보아야겠구나
관찰 결과 아직은 어려서 도저히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구체적인 사실과 근거를 남편에게 말해주고 같이 결정해야겠구나
사실 게임중독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아이와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아이가 쉽게 중독에 빠지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무조건 못하게 하는 것이 안전해 보여서 한쪽의 말만 취사선택한 것을 인정해야겠구나
생각 바꾸기 작업을 하고 나니 일단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분노의 주된 원인은 스마트폰 그 자체가 아니라 남편보다 내가 옳다는 신념, 그럼에도 남편이 나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는 생각 때문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다.
이 점을 먼저 인정하고 나자, 그동안 남편을 존중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나만의 아이가 아닌데, 아이와 관련된 일은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 의견만 관철하려고 들었다. 이 사실을 인정하니 반대편에 있는 남편의 어려움, 아쉬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서 아이에게 스마트폰 게임을 허락하되, 아이와 상의해서 사용시간을 정했다. 그리고 지켜보기로 했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아이는 게임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중독이 염려될 정도로 몰입하지는 않는다. (사실 아직도 아예 안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내 걱정이 과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리고 남편을 존중함으로써 신뢰할 만한 양육 파트너를 얻었다는 점이 가장 큰 수확이다. 그전까지는 매사 나 혼자 짐 지고 가느라 버거웠는데, 이제는 남편과 상의할 수 있어 한결 수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