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광야를 지나고 나서 나는 불신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듭났다.
두 번째 광야를 지나고 나서 나는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소명에 따라 사는 삶을 살기 시작하자 나에게 갑자기 여러 은사들이 쏟아졌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장점이 더욱 계발된 것이었고, 어떤 것은 전에는 내가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것이나 내가 별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쉽게 얻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마치 하늘창고의 문이 활짝 열리고 선물이 우수수 떨어진 것만 같았다.
내가 은사들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나에게는 조금씩 영향력이 생겼다. 나는 이런저런 깨달음들을 말과 글로 표현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일대일로 도왔으며, 여러 사람을 모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깨달음을, 누군가는 위로를, 누군가는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 나를 통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경이로웠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신중하게 분별해 가면서도 신나게 은사들을 사용하였고, 그 열매들을 보면서 기쁨을 얻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점점 심드렁해지고,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을 벌여놓은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내가 이런 상태라는 것조차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감격에 차서 ‘당신을 통해 은혜받았다’는 소감을 전했을 때, 겉으로는 함께 기뻐했지만 속으로는 ‘아, 그래? 거 참 잘됐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라는 마음이 드는 나 자신을 보고 너무 놀라서,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마음의 소리는 아주 솔직했다.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은 감사하지만,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뭐. 나한테 무슨 이득이 된다고.’
그 소리를 듣고 나는 더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예수 믿고 변화되기 이전부터 남 돕는 일은 즐겨하곤 했다. 때로는 오지랖이 지나쳐 물불 안 가리고 돕다가 내가 힘들어지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다니?
다시 한번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전의 나는 남을 도와서 어떤 결과가 좋을 때, ‘내 힘으로 사람을 도와서 결과를 이끌어냈다’고 생각했다. 내 능력, 내 성취로 여겼던 것이다. 은사를 받은 초기에도, 너무 쉽게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여전히 이것을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은사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분명해졌다. 은사는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의 결과도 내 성취가 아니다. (예를 들면, 내가 쓴 글 중에서 깊은 통찰력이 있다고 사람들의 칭찬받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다. 분명한 음성으로 주신 건 아니지만 그 주제를 접했을 때부터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나는 홀린 듯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주워 담아서 글로 옮겼다.)
성취감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이득이라도 남았으면 모르겠지만, 내가 써보니 은사는 다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깨달음을, 위로를, 은혜를 받는 사람들은 모두 남들. 나는 그저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물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도 처음에는 감격이었지만, 계속되니 슬슬 익숙해지고. (배부른 소리 죄송합니다)
이후에 들었던 어느 설교 말씀은 ‘은사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타인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로 내 느낌에 확증을 더해 주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추수 때 트랙터를 빌려오는 것과 같다고. 어차피 빌린 것이기에 누구의 트랙터가 더 큰지 자랑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거기에 덧붙여 은사가 크다고 해서 신앙이 깊다고 볼 수도 없다고 한다.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느냐에 달려있지, 받은 은사가 얼마나 큰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실제로 큰 은사를 지녔으면서 인격은 엉망인, 성령의 열매는 하나도 없는 사역자들도 있단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보시겠는가?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실망이었다. 적어도 은사를 통해 일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은사를 주시고 나를 쓰시는 걸 보면 그래도 내가 신앙은 확실한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잖아. 이건 도대체 나한테 뭐가 좋은 거지?
그래서 하나님께 여쭈었다.
“하나님, 은사를 사용해서 일하면서 제가 얻는 게 뭔가요?
다 남들 위한 일이면서 제 성취도 아니고, 이걸로 신앙심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면요. 그럼 저는 그냥 일만 하는 건가요?”
하나님은 답하셨다.
“나의 기쁨에 참예하라.”
하나님의 기쁨이라... 아무리 봐도 그건 영혼 구원이겠지.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것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직 불신자인 친정 가족을 생각하면 가끔 다급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지만 그뿐, 내 눈으로 보지 못한 사후세계는 현실감 제로. 주위 불신자들을 봐도 전심으로 크게 안타깝게 느낀 적이 손에 꼽는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 답을 얼마 전에 받았다.
연수차 미국에 와서 한 가정을 만났는데, 하나님은 그 가정을 위해 중보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순종하기로 했으나 그 가정의 사정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눈에 이 가정이 어떻게 보이시는지’를 여쭈었다. 무엇을 어떻게 중보하는 것이 하나님 뜻인지 알고 싶었다.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귀한지,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하나님은 내게 몇 가지 순종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할만하고, 어떤 것은 하기 싫었으며, 어떤 것은 ‘과연 이것이 맞는가?’ 하고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어떤 것은 기쁘게, 어떤 것은 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다가 결국 마지못해, 어떤 것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해 가면서 순종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먼저 내게 회개의 은혜를 주셨다. 내가 막연하게 머리로만 알고 있던, 느낌으로만 가지고 있던 죄들이 하나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나는 울면서 회개했고, 며칠 동안 회개의 은혜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난 뒤 어느 날 저녁, 나는 어떤 찬양을 듣다가 내가 중보하는 그 가족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내 눈을 열어서 밝히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찬양의 가사와 같았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참 귀하다. 어느 보석보다 귀하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로부터 나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얘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얘기를 숱하게 들어 알고 있었다. 내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면 '나를 진짜 사랑하시는구나' 싶기도 했고, 가끔은 그 마음이 느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눈과 하나님의 눈이 일치하고, 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하자, 나는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영혼을 소유하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잃어버린 영혼이 죄에서 해방될 때, 구원받을 때, 자유케 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 나의 눈이 하나님의 눈과 일치하고,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일치할 때,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나는 다른 기쁨은 필요 없다.
앞서 은사를 농부가 추수 때 빌리는 트랙터와 같다고 했다. 그럼 농부의 기쁨은 무엇이겠는가? 빌린 트랙터가 얼마나 큰 지가 아니다. 바로 ‘추수의 기쁨’. 작은 트랙터로 적은 곡식을 추수하는 것보다 큰 트랙터로 한 번에 많은 곡식을 추수하면 그 기쁨이 더욱 커지겠지.
그러므로 나는 이제 더 큰 은사를 소망한다. 한 번에 수십, 수백, 수천 명씩 추수할 수 있는 그런 은사.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31)
그리고 이 모든 은사가 그저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기쁨에 참예할 것이다.
ps. 약 15년 전쯤, 나는 내게 찾아온 어떤 기회를 포기하는 대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갖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