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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ug 30. 2024

미국 초등교육의 위대함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아이가 학교에 간 지 한 달째.


어느 날 메일함을 열어 보니 학교에서 온 것들 중에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Heritage Night Family Stations"


대충 읽어보니 학교에서 세계 각국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행사를 개최하는데, 가족들이 참가해서 자기 나라를 소개하는 station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학교의 첫 행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보다 먼저 연수 온 동료들이 '학교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입을 모아 조언해 주던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참여를 한다?


고민하던 차에 아이와 같은 반에 있는 한국인 친구의 엄마로부터 '행사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에는 우리 아이를 제외하고 총 3명의 한국 학생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아이와 같은 학년에 1명이 있고 같은 반이 된 참이었다. 그 친구는 1년 먼저 와서 작년에도 그 행사에 참여했고, 그때 사용한 자료들도 가지고 있단다. 경험 있는 분이 가이드를 해 주실 테니 다행이다 싶어 안도했다.


그 친구 엄마의 주선으로 순식간에 같은 학교 한국인 가정들이 행사 준비를 위해 모였다. 한국을 알리는 사진들이 붙어 있는 판넬과 팽이 종이접기, 제기차기 도구 등 작년 행사 때 쓴 자료들을 보니 일단 든든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괜찮을까?' 싶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남들 앞에서 뭔가 할 때에는 요란뻑적지근하게 준비했던 것 같은데. 반 장기자랑도 아니고 전교 행사인데 말이야.


그래서 조심스럽게 "뭔가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물으니, '다들 허접하게 해 와서 괜찮다'고 한다. 반신반의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행사 준비를 빙자한 통성명 및 수다 떨기에 집중하다가 헤어졌다. 남의 나라에서 만난 한국 엄마들과의 수다가 어찌나 달콤하던지. ㅎㅎㅎ


행사 당일, 준비를 위해 시작 시간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행사장 한 켠에 'KOREA'라고 씌인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얼른 판넬을 세우고, 종이접기와 제기차기 도구 등을 차려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로는 사람들을 모을 수 없을 것 같다. 요새 애들이 누가 종이접기를 한다고. 남의 나라 전통놀이에 과연 관심이나 있을까? 생각 끝에 부랴부랴 다시 집까지 달려가서 BTS와 블랙핑크 사진을 프린트해 와서 붙이고 아이패드로 K-POP 뮤직비디오를 틀어놓았다.


세팅을 마친 후 좌우를 둘러보니 반 친구 엄마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다들 별 거 없구만. ㅎㅎ 우리 옆 테이블에 있는 러시아 부스에는 한 러시아 엄마가 심지어 판넬도 없이 마트료시카인가 뭔가 하는 러시아 전통인형 몇 개를 차려두고 앉아 있다. 아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별 거 없는 행사에 너무 의미를 두었나' 싶어 살짝 실망감이 들려는 찰나, 우리 부스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최고 학년으로 보이는 제법 큰 아이들조차 K-POP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은 채 종이접기와 제기차기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우리 아이는 몰려든 아이들에게 종이접기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다가 영어가 달리자 직접 종이접기를 시연해 보였는데, 이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호기심 가득한, 그 진지한 눈망울에 나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한국에서는 저 나이의 아이들은 아무도 종이접기를 하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고 학원과 학원 사이를 오가며 짬시간에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한국 아이들의 흐릿한 눈빛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 미국의 초등학생들은 어쩜 그런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비결이 무엇일까?


같이 온 부모들도 옆에서 구경하거나 같이 참여하면서 행사를 즐기고 있다. 학교 뒤뜰에는 학교 측이 고용한 DJ가 신나는 음악을 틀면서 비눗방울을 날리고, 몇 대의 푸드트럭에서는 핫도그와 음료수 등을 팔고 있었다. 그 흥겨운 분위기에 나는 또 감탄하고야 만다. (이후의 여러 경험들을 보태어 보면) 미국인들은 별 것 없어 보이는 행사도 함께 모여서 즐기는 재주가 있다. 그 삶의 여유가 부럽다.


나도 오늘만큼은 '행사를 제대로 준비했는가, 잘 치렀는가' 하는 한국식 성과주의적 마인드에서 벗어나 함께 누려야겠다 싶어, 괜스레 푸드트럭을 기웃거리고, 음악을 들으며 허공에 떠도는 비눗방울을 만져보기도 하다가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아이의 담임선생님한테서 메일이 왔다. '아이가 교실에서 리더십을 보여준 것으로 내일 행사에서 상을 받게 되었으니 참관을 오라'는 취지의 메일이었다.


이제 미국 온 지 한 달된, 아직 영어가 짧아 의사소통도 어려운 애가 교실에서 리더십을 보여줬다니 무슨 소리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혹시 얼마 전 Heritage Night 행사 때 열심히 해서 품행상 같은 걸 받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족한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종이접기를 배우려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거의 두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킨 아이의 인내심과 성실함에 나도 내심 놀란 참이었다. 아이란 부모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부쩍 크는구나 싶다.


다음 날 오전 8시 40분, 기쁜 마음으로 행사장인 학교 강당에 참석했는데 같은 반 한국인 학생의 부모도 와 있었다. 그 집 아이도 오늘 상을 받는다기에 무슨 상인지 물었더니, 분기마다 모여서 그때까지 배운 것을 자축(?)하며 반 아이들 몇몇을 뽑아서 상을 주는데, 일 년 동안 반 아이들 전부 받을 수 있게 1/4씩 돌아가며 뽑는단다.


뭐야, 참가상 같은 거였잖아. 슬쩍 김이 샜지만, 어쨌거나 상을 받는 건 기쁜 일이지 싶어 행사를 즐겨보기로 했다.


부모들이 강당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자 아이들이 선생님의 인솔 하에 학년별, 반별로 한 줄씩 걸어 들어와 강당 앞편에 앉았다. 그 뒤 갑자기 쿵.쾅.쿵.쾅. 비트가 있는 음악이 크게 울리기 시작하더니 선생님 한 분이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추며 뛰어들어온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난리가 났고, 학부모석에서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 틈에 나 혼자 어리둥절. 나는 누군가, 여긴 어딘가. 내가 학교에 온 건가, 놀이동산에 온 건가.


인형탈을 쓴 선생님 한껏 분위기를 띄울 동안 뒤에서 드레스코드를 맞춰 입은 선생님들도 신이 나서 함께 춤을 추고, 그 흥으로 지난 분기 학사일정을 소개할 때도 분위기가 들썩들썩. 와우, 미국에는 죄다 흥부자들만 있나 보네. 미국 초등학교 교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새삼 리스펙이다.


그 뒤 반별로 이번 분기의 수상자를 호명하는데, 한 반에 5~7명씩 불려 일어난 뒤 뒤편에 앉은 부모의 얼굴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이에 부모는 격렬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답했다. 와우, 1/4 학사일정을 마친 게 이럴 일인가! 놀라워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성실히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상을 받는다. 부모들은 이를 축하해 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모두 학교에 와 있다. 선생님들은 인형탈을 쓰고 옷을 맞춰 입고 행사를 축제처럼 만들어 아이들을 기쁘게 해 준다. 무엇을 해도 잘했다고 칭찬받고 격려받는 곳, 남과 비교당하지 않는 곳, 이곳이 미국의 초등학교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찌 맑고 밝게 자라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은 이러한 어른들의 노력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것이지 싶다.



한 달 뒤, 이번엔 학교에서 4학년 리코더 콘서트를 한다고 오라네. 연이은 행사에 이제 기대감도 별로 없다;; 그저 미국 초등교사들은 어떻게 그 많은 행사를 다 준비하는지, 미국 워킹맘들은 어떻게 직장에 다니면서 그 많은 행사들에 다 참가할 수 있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지난번에 갔던 강당에 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못 긴장한 아이들의 눈빛이 귀여웠던 것도, 엄청 쉬운 곡을 다 같이 천천히 연주하는 것도 예상대로였다. 그래, 미국 애들이 발표회 있다고 한마음 모아 치열하게 연습했을 리가 없지. 우리 애도 집에서 리코더 한 번 부는 걸 못 봤는데.


그런데 합주 사이에 있던 첫 번째 독주가 나의 예상을 깨고야 말았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나와서 숨을 가다듬더니 리코더를 입에 대기에 '독주까지 할 정도면 잘하는 아이를 뽑아 놓은 거겠지? 드디어 명연주가 시작되는 건가?' 하고 기대감에 차서 바라봤건만, 첫 음만 듣고도 결코 단체석에 앉은 애들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 데다가, 어라? 한 소절하고 끝이다?


이 정도로 학부모들이 모두 지켜보는 학교 행사에서 독주를 시킨다고? 어리둥절한 사이에 그런 독주가 무려 7번이나 반복되었다. 한국 같으면 연습 축에도 들지 못할 한 소절짜리 연주가. 나중에 듣고 보니 (학교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이런 행사에서 잘하는 아이를 뽑아서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아이가 자원해서 나온단다. 어쩐지 7명 모두 여자아이더라니. 남자애들은 연주고 뭐고 틈만 나면 지들끼리 장난치느라 바쁘더라.


또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국 같았으면 리코더 특기생 따위를 노리는 리코더 영재가 5살부터 연습한 곡조를 전문가 뺨치게 연주했을 것이다. 실력 없는 아이에게 주어지는 무대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초등학교는 다르다. 다른 주에 사는 지인도 그 동네 초등학교에서는 수학 올림피아드 반에 수학 잘하는 아이가 뽑혀서 가는 것이 아니라, 수학을 하고 싶은 아이가 자원해서 간다고 했다. 잘하지 못해도,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미국 초등학교이다.


새삼 내가 다니는 대학의 강의실 풍경이 떠오른다. 교수는 수업시간에 쉴 새 없이 질문을 하고, 학생들은 거기에 대해 자유롭게 답변하면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진다. 자신의 답이 맞고 틀린지, 자신의 말이 논리적인지 아닌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계신 한국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에 미국 학생들이 너무나 무식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지나고 보니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그것이 건강한 토론으로 이어지는 문화가 미국이 선진국이 된 원동력인 것 같다고.


나도 동감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감 있는 대학생들은 이런 초등학교에서부터 길러지는 것이다. 그것이 미국 초등교육의 위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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