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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05. 2021

퇴마록을 추억하며

소설의 매력, 인물

1994년 여름. 기록적인 폭염이었다.

당시 고1이었던 나는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더위를 견뎌야 했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고물 선풍기 두 대 앞은 소위 반에서 잘 나간다는 남자애들 차지였다. 그나마 더위를 별로 안 타는 체질이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으아~~!!!" 하고 반기를 들며 반에서 쿠데타라도 일으킬 뻔했다.


창문을 한껏 열어놓고 모기에게 뜯기며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도중, 남자애들 분단 사이에서 A4 용지 뭉치가 도는 것을 보았다. 한 명이 읽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있었다.


야한 잡지인가? 잡지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궁금해하며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남자애 하나가 "볼래?" 하며 뭉치를 내밀었다. 얼른 받아봤는데 세상에! 내가 엄청 좋아하는 공포 스릴러 소설이었다. 자율학습 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손에서 놓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너무 재밌다. 그런데 왜 소설에 A4 용지에? 다른 친구가 알려주었다. PC 통신 하이텔에서 이우혁이라는 사람이 연재하는 소설이란다. 아하, 그래?


PC 통신이라는 것, 들어는 봤지만 뭔지는 몰랐다. PC 있는 집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대학 가면서 삼성전자 매직 스테이션을 몇 백만 원의 거금을 들여서 사거나, 컴퓨터 좀 잘 아는 형이 있는 애들은 용산에서 조립식 컴퓨터를 맞춰 오곤 했다. 나는 대학 가려면 멀었으니 직접 하이텔에 접속할 기회라고는 없었다.


그때부터 반 친구가 가져오는 A4 뭉치를 순번을 정해서 기다리면서 받아 읽다가, 퇴마록 국내편이 출간된 것을 알고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당시에는 책을 살 용돈이 부족했다). 그때부터 말세편이 완결될 때까지 장장 십오 년의 기간을 나는 퇴마록과 함께 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훨씬 긴 세월이다. 2012년 즈음에 새로 단장한 소장용 하드커버판이 나와서 전권을 구입한 다음부터 나는 지금도 여름이면 한 번씩 퇴마록을 꺼내 든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하지만 결말을 다 알고 나서도 무한 반복하며 책을 읽었다. 문장은 조야했고, 읽으면 읽을수록 여성 인물을 그리는 관점에 거슬리는 부분이 꽤 있으며, 국뽕끼도 다분했지만(처음 쓰였던 시대가 1994년임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래도 좋았다. 무엇이 좋았냐면, 소설 속 인물들이.


강직한 현암, 인자한 박 신부, 똘똘하면서 속이 깊은 준후와 성깔 있지만 정 많은 승희. 거기에 차분하고 지적인 연희와 의롭고 유능한 백호까지. 그들은 내가 동경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한 싸움을 하는 것이 보기 좋았다. 그것은 내가 동경하는 삶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인물을, 그런 삶을 추구하는지도 모르고 그들에게 공명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삶을 함께 하고 싶었다.


인생의 고난이 계속되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힘 빠지고 서러운 날에도 나는 그들을 만나서 힘을 얻었다. 그들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기운 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난관에 부딪힐 때도 은연중에 박 신부라면, 현암이라면... 하며 내가 동경하는 그들을 닮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얼마 전에 '인스타 친구'라는 소설을 발행하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분명히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는 장삿속에 눈이 멀어 차현의 진심을 이용한 레이나가 명백한 가해자였다.


그런데 퇴고를 하던 중에 레이나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이 둘 낳고 경력이 단절된 그녀

아이들이 커갈수록 늘어나는 교육비에 한숨짓는 그녀

어딘가의 자기 계발 세미나 같은 곳에서 '당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공략하라, sns로 나만의 채널을 개설하라'는 조언을 받는 그녀

육퇴 후 마시는 맥주 한 캔의 낙을 포기하고 독하게 다이어트에 매진하는 그녀

애 재우고 난 뒤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인스타그램에 접속해서 마케팅 대상이 될만한 사람들에게 댓글을 다는 그녀

신부화장을 하고 레깅스를 입은 다음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짓는 그녀


나도 나름의 입장이 있다고, 다들 고군분투하며 살아남아야 하는 이 세계에서 일방적인 가해자 같은 건 없다고, 레이나는 말하고 싶은 듯했다. 나도 모르게 연민이 생겼다.


최근에 읽은 '보건교사 안은영'의 서문에서 정세랑 작가님이 '안은영이 가장 든든한 친구가 되어 주었기에, 가끔은 대화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고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 반가움과 안도감(?)마저 든다(나도 모르게 2D에 빠진 오타쿠가 되었나... 사실 조금 걱정했다).


책을 펼쳐 들면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소설의 매력이다. 그런 고로 나는 오늘도 소설을 읽고, 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2


https://brunch.co.kr/brunchbook/mycho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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