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하루는 늘 붙어 다니던 같은 과 동기와 중앙도서관 열람실에 갔다. 그 애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읽어 봤어?"
아니. 들어는 보았다.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더라. 하지만 나는 딱히 잃어버린 것도 없기에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 무렵 같이 유명세를 탔던 무라카미 류와 헷갈리기만 할 뿐.
그 애는 마침내 찾았다는 듯 '댄스 댄스 댄스'를 꺼내 들고는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그렇게 재밌단다. 야하고."
아하, 그래? 나는 심드렁해 보이는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고 돌아온 다음, 그 애가 책을 반납하자마자 도서관에 달려가서 잽싸게 빌렸다. 어디 얼마나 야한지 보자.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만난 하루키의 소설에 나는 단숨에 빠져들었다. 야해서가 아니었다. 섹스 장면이 많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를 사로잡은 건 '문장'이었다.
그전까지 나의 독서는 '스토리를 읽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결말이 무엇인지에만 관심을 두었다. 책을 읽을 땐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집중해서 줄거리를 파악했다. 주로 좋아하는 것은 추리소설이었다.
그런데 하루키의 소설은 전혀 달랐다. 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문장을 음미하는 독서를 처음 해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루키 본인도 책을 읽을 때 '문장을 음미할 수 없으면 읽는 걸 멈춘다'고 하더라. 그의 문장은 신선하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데도 손에 잡힐 것처럼 그려졌으며, 군데군데 위트가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하루키의 광팬이 되었다. 신간이 나오는 족족 수집했고, 본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한동안 시험공부를 하느라 아침부터 밤까지 텍스트들에 파묻혀 지내던 기간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조차 활자를 보는 일은 엄두가 안 나서 그 기간 동안에는 책을 읽지 않았지만 하루키는 예외였다. 매일 같이 아무 책, 아무 페이지나 펼쳐 들고 문장을 음미했다.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던 중 언젠가부터 하루키 책을 손에 잡지 않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이 더 이상 신선하지 않았다. 하루키의 초기작들은 신진 작가의 풋풋함, 아직 젊고, 적당히 가난하던 시절의 신선함과 날카로움이 있었는데, 뒤로 갈수록 부유한 중년의 루즈한 생활 느낌이 났다. 어쩌면 그냥 내가 너무 많이 읽어서 질려버린 건지도 모른다. 내가 소설 따위 읽을 겨를이 없는 워킹맘이 되어서일지도.
한동안 신간 소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몇 달 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서점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옛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 사이 나온 작품들을 둘러본 끝에 '기사단장 죽이기'를 집어 들었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하드커버로 된 두툼한 책 두 권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기본적인 플롯은 '태엽 감는 새'와 비슷했고, 거기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댄스 댄스 댄스' 등 초기작에 있던 설정들을 제각기 끌어와 버무린 것 같았다. 그놈의 전쟁과 우물은 질리지도 않고 나오는구만.
게다가 전작들과는 다르게 인물들에 대한 의문을 적절히 해소하지 않은 채(그래서 멘시키는 도대체 뭐하는 인간인가!) 느닷없이 밝은 분위기로 끝을 내 버렸다. 이게 소위 '자기 복제'라는 건가. 평생을 외국에서 살면서 돈 떨어질 때마다 한국에 들어와서 디너쇼를 한다는 모 국민가수가 생각났다. 하루키 상, 정말 실망이야. 이제 당신의 책은 읽지 않겠어.
온라인 코칭 모임을 시작한 작년 늦봄 즈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작은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몇십 년 치 묵은 감정을 문장으로 쏟아내면서 놀랐던 것은 '내 안에 이렇게 깊은 슬픔이 있었나'라는 것보다도 '내가 이렇게 글쓰기를 좋아했었나'라는 것이었다.
몇 달에 걸쳐 격한 마음을 토로한 다음 좀 더 편안하게 글을 쓰게 되었고, 그 무렵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딱히 누가 알아주는 건 아니지만 '작가'라는 직함을 걸고 글을 쓰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브런치 글쓰기에 훨씬 더 깊게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쓴 글들을 돌이켜보니 나만의 문체 비슷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유형의 글쓰기 수업도 받은 적이 없지만 내가 쓴 문장들에는 비슷한 스타일이 있었고, 어쩐지 낯이 익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나를 처음 문장에 매료시켰던 하루키, 나는 그와 비슷한 문장을 추구하고 있구나. 몇 년 동안 그의 작품들 안에 빠져 있으면서 나는 은연중에 그것을 닮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구나. 그는 내 무의식의 글쓰기 스승이었구나. (내가 그만큼 잘 쓴다는 얘기가 아닌 건 아시쥬? ㅎㅎ)
새삼 그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하루키가 궁금해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세상에. 내가 꿈꾸던 인생이 거기에 있었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같은 시간에 같은 분량의 글을 쓰고, 맥주를 마시며 스스로를 위한 요리를 하고, 취미로 달리기를 하는 생활. 오직 자기가 쓰고 싶은 것만, 쓰고 싶을 때 쓰기에 '라이터스 블락(writer's block)' 같은 것은 걸려본 적이 없다는 그.
타인의 시선이라고는 끼어들 틈 없이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인생은, 내가 가장 원하지만 스스로 원하는지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나의 무의식은 하루키에게 그토록 공명하고 있었구나.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서. 그가 왜 그렇게 우물을 좋아하는지 짐작이 가.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는 다이빙 같은 것이니까.
그러고 나니 '기사단장 죽이기'도 달리 보였다. 나는 최근에 소설을 의도했으나 남들은 에세이로 받아들인 글(패닉 바잉)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은 내 맘에 쏙 들게 완성되었기에 소설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도 고칠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언젠가 그 플롯을 바탕으로 진짜 소설을 완성하겠다는 욕심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소설을 보면서 '자가 복제'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어쩌면 하루키도 자신의 전작들을 아우르는 어떤 세계관을 완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나의 스승, 나의 롤모델인 하루키를 통해 좀 더 명확해졌으니 이제 즐겁게 정진하련다. 그러다 보면 십오 년쯤 뒤에 '부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을 낼지도 모르니. 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