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으로 이사 간 친구가 고구마를 보내왔다. 그걸 오늘 마지막 삶았다. 시중에서 사 온 것은 쉽게 상하기도 하고 새 싹이 나 맛이 떨어진다. 친구네 것은 길이가 20~30㎝ 정도로 길다. 생긴 건 볼품이 없지만 상하지 않고 맛도 좋다. 고구마는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좋아한다. 삶아먹고, 구워 먹고, 생으로 깎아 먹고……. 추운 겨울이면 가족과 함께 즐겨 먹던 식품이라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내 고향 여수에서는 씨 고구마를 ‘무광’이라고 한다. 무광에서 자란 순을 심고 나서 비라도 오면 다행이지만 그걸 맞추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비를 맞으며 심어야 제대로 심는 것이다. 만약 심어 놓고 가물기라도 하면 말라죽으니 물을 줘야 한다. 물을 주면서 몇 배 고생해 키워도 비 맞으며 심은 고구마에 비해 제대로 잘 자라지 않는다. 농사일 치고 쉬운 게 없지만, 비 맞으며 엎드려 고구마 심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랄 때는 한여름 뙤약볕에 무성한 줄기를 제쳐 가며 김을 매야한다. 그래도 다른 농작물에 비해 손이 덜 가면서 수확이 좋은 게 고구마 농사이다.
고구마는 초겨울 서리가 내릴 즈음에 순을 걷어 내고 캔다. 서리를 한 번이라도 맞으면 잎 색깔이 까맣게 변하여 캘 때를 알린다. 호미로 캐야 되지만 밭이 넓으면 그리 할 수 없다. 소 쟁기질하는 아버지를 우리는 줄지어 따라가면서 고구마를 잽싸게 줍는다. 빨리 주어야 밭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쟁기에 파묻히지 않기 때문이다. 쟁기로 캐다 보면 잘리고 흠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따로 담는다. 지금 쟁기를 따라가며 고구마를 신나게 줍는 듯 그 광경이 눈에 선하다.
캔 고구마는 짚 가마니나 바지게에 조심스럽게 담아 옮긴다. 무거워서 많이 짊어지지 못하는 데다가 밭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다. 거둬들인 고구마는 방 안쪽 윗목 차지다. 고구마 두지는 수수 대 또는 대나무로 엮거나 멍석과 볏짚을 새끼줄로 감아 묶어 올리면서 고구마를 쌓는다. 그것도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잘 못하면 보기만 싫은 게 아니라 무너져 사고가 나기도 한다. 두지에 가득 찬 고구마를 보면 부자가 안 부럽다.
이렇게 고구마 거둬들이는 일로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고 겨울나기에 들어간다. 농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땀 흘려 지은 작물을 수확하는 것은 농부의 기쁨이고 보람이고 희망이다.
고구마를 요즘은 간식으로 먹지만 내가 자랄 때는 주식이었다. 먹을거리가 늘 모자랐던 어릴 적, 밥 대신 먹거나 곡식에 섞어 밥을 지었다. 아니 고구마에다가 곡식을 섞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적에 고구마를 자주 삶았다. 큰 가마솥에 삶을 때는 꼭 박 바가지를 솥 안에 엎어 놓는다. 그러고 고구마를 넣고 물을 붓는다. 바가지를 엎어 놓는 것은 삶는 것보다 찌는 효과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물이 모자라기라도 해서 밑에 깔린 것이 구워지면 그게 그리 맛이 좋다.
아궁이에 구워 먹을 때 불이 세면 시커멓게 탄다. 그걸 먹으면서 숯검정이 묻은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낄낄대던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약한 불이나 화롯불 재속에 묻어 오래 구우면 말랑말랑해진다. 또 두껍게 썰어 난로 뚜껑이나 석쇠에다 구워 먹기도 한다. 고구마는 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와 함께 먹는 것이 제 맛이다. 삶은 고구마를 얇게 썰어 밤이면 서리 맞히고 낮이면 햇볕에 적당히 말리면 쫄깃쫄깃하고 달짝지근한 맛이 요즘 과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
얇게 썰어 햇볕에 말려 주정(酒酊) 원료로 팔기도 했다. 소위 ‘절간(切干) 고구마’인데 지방에 따라 ‘백대기’ 또는 ‘빼깽이’라고도 한다. 말릴 곳이 마땅치 않아 지붕 위에 말리기도 한다. 멀리서 봐도 하얀 지붕이 정겨웠다. 서리에는 그대로 두지만 비라도 내리면 지붕 위에 올라가 비설거지 하느라고 생난리를 친다.
고구마는 뿌리만 먹는 것이 아니다. 버릴 것이 없다. 잎줄기는 나물이 되어 밥상에 오르기도 하고 줄기와 잎을 말리면 소가 먹을 겨울 양식이 된다. 소에게 생잎을 너무 많이 먹이면 설사를 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쇠죽을 끓일 때 고구마와 볏 집 그리고 쭉정이 곡식이라도 넣고 끓이면 그거야말로 소에게 최고 보양식이 된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로 알려져 있다. 품종은 전 세계에 약 2천여 종으로 추정된다. 유럽과 아시아 필리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조선 후기인 영조 39년(1763년) 대마도에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와 동래(부산)와 제주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하여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 60여 품종이 재배되고 있으며, 호박고구마, 밤고구마, 당근 고구마, 자색고구마 등 특징을 잡아 부르는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흔히 호박고구마라고 부르는 속 색깔이 노란 고구마는 약 20여 종이다.
고구마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효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뜻의 ‘효자마(孝子麻)’의 일본어 발음인 ‘고코마’가 ‘고구마’로 변했다는 설과 일본말 ‘고귀위마’(古貴爲麻)에서 유래되어 ‘고구마’가 됐다는 설이 있다.
겨울철 인기 식품인 고구마는 효능도 다양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3대 면역식품(고구마, 토마토, 케일) 중 하나로 최고의 면역력 효과가 있다 하고, 최근 방송에서는 고구마, 호박, 당근을 매일 먹는 사람은 폐암 발생률이 약 50% 저하된다고 한다. 도쿄대 의과학연구소는 고구마의 발암 억제 효과가 무려 98.7%라고 한다.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 예방과 장 건강,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고혈압 등 성인병 예방, 비타민 C와 칼슘이 풍부하여 관절염 및 노화 예방과 피부 미용에도 효과가 있다 한다. 주의할 점은 과다 섭취하지 말기를 권하고 있다.
고구마는 외래 작물이지만, 널리 재배되면서 먹을 것이 없을 때 굶어 죽는 사람이 크게 감소하여 사람에게 기여를 많이 한 고마운 식품이 지금도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최근 한 설문 조사 결과 겨울철 가장 인기 있는 간식 1위로 군고구마가 붕어빵과 호떡을 제쳤다고 한다. 영양소가 풍부한 고구마 먹고 이번 겨울을 모두 튼튼하게 보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