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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대 Oct 04. 2020

시시콜콜 장애인 체험기

  다리를 다쳐 정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지 꼭 한 달째다.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해 온 나에게 쉬어갈 기회가 된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장애인 체험, 이른 노인체험을 확실하게 한다. 이제 글을 쓸 생각도 하고 점점 사람이 돼가는 모양이다. 어느 교수로부터 ‘환갑을 넘기면 누구나 학위는 없어도 박사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래 살다 보면 연륜이 쌓여 폭넓게 알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그 말보다 지금 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하는 말이 더 실감 난다. 한 달간 느껴보지 못한 이런저런 일들을 거의 매일같이 겪으며 깨닫고 배운다. 다친 것이나 입원해 수술받은 것, 몸 아픈 고통이나 교통약자가 돼 목발로 걷기 등 모두 처음이다.


  다친 원인부터 생각해 본다. 자전거로 여의도 윤중로 벚꽃구경을 가다가 한 손은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마스크를 올리려다 중심을 잃어 몸을 실은 자전거가 오른쪽 발목을 덮쳤다. 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고 딴짓하거나 곁눈질하면 사고 나기 일쑤다. 자전거 타기는 더 그렇다. 두 바퀴로 중심을 유지해야 하고, 달리지 않으면 서있을 수도 없다. 승용차나 다른 교통수단처럼 함께 탈 수도 없으니 결국 나 혼자 가야만 하는 인생길과도 같다.


  내가 수술대에 누워 설명을 듣자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수술 장면, 가족이 수술할 때의 보호자 입장과는 달리 많이 긴장되었다. 뼈에 핀을 고정하는 수술 뒤 마취가 깨고 나서 다음날까지 아픈 고통은 참기가 어려웠다. 계속 진통제에만 의지할 수도 없다. 간호사는 수술 후 소변을 오래 못 보면 방광에 치명적이라고 다그친다. 관을 꽂아 빼내겠다고 협박(?)도 한다. 마취가 덜 깨 하반신이 무감각 상태인데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수술 뒤 소변은 이틀 만에, 대변은 닷새 만에 방출할 수 있었다. 변비를 앓아 본 적은 있지만 대소변 잘 보는 것이 그렇게 큰 행복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몸은 아파도 동병상련이라고 생면부지의 환자들과 함께 한 8일간은 참 행복했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맞다. 특히 503호 건설 비계공 박 씨, 303호 88세 송 씨 어르신이 어서 나았으면 좋겠다. 병원에 있는 동안과 그 뒤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아내에게는 응석을 부릴 수도 있었다. 옆 동네 살며 눈치가 빨라 병원을 찾은 교우 류 씨 부부께 신세 졌고 아내를 유도 신문해 병원을 찾은 고향 친구, 퇴원 후에도 수시로 발이 돼 준 그 친구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우리 몸 어디에 병이 나면 가장 힘들까?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겠으나 다리를 제대로 못쓰는 것도 대단히 힘들다. 퇴원 길에 목발로 열흘 만에 직장에 갔다. 목발 걷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팔목 쪽 양손바닥과 양쪽 겨드랑, 성한 한쪽 다리가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한두 달도 이렇게 힘든데 평생을 장애인으로 사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직장 일은 해야 되고 택시로만 출퇴근을 할 수가 없다. 한 발자국 더 걷기가 힘든데 전철을 이용하려니 승강기는 너무 멀고, 장애인시설도 없어 목발로 계단 오르내리기는 힘들다기보다 이만저만 위험한 일이 아니다. 오르내리다가 앞으로 꺼꾸러지거나 뒤로 넘어지기 쉽다. 오른쪽 어깨 혹은 팔꿈치를 계단 난간대나 벽에 기대면 훨씬 덜 위험하다. 비 오는 날이면 비옷이라도 입고 목발 걷기를 하면 몰라도 혼자 우산을 쓰고는 불가능하다. 친구에게 목발 걷기가 힘들다고 했더니 “두 발보다 세 발로 걸으면 더 잘 걸어야 되는 거 아닌가.”라며 약을 올리기도 하고 “운동을 해야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힘들 때는 운동한다 생각하니 훨씬 덜 힘들다.


  퇴원 후 약 1주일은 양쪽 목발, 그 뒤 1주일은 한 손에 등산 스틱을 짚다가 지금은 모두 버리고 절뚝거리지만 그냥 걷는다. 이렇게만 돼도 날아다니는 것 같다. 허지만 비 오는 날은 역시 힘들다. 깁스 신발은 낮고 막혀있지 않아 빗물 감당이 안 된다. 이래저래 환자는 괴롭다.


  나 같은 사람을 태우는 버스나 택시 기사의 인간성과 자질도 갖가지더라. 나는 택시를 타지 않으면, 거리가 멀고 계단이 많은 전철 대신 버스를 탄다. 목발을 짚고 타기 쉽도록 정류장 인도 가까이에 바짝 차를 붙여 세워주거나, 타고나서 자리를 잡고 난 뒤 출발해 주는 배려 깊은 기사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더라. 온갖 인상을 다 찌푸리고 내가 내린 뒤에도 구시렁거리는 입모습이 보인다. “다친 사람이 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불편하게 하느냐.”며 욕했을 것이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도 다쳐 봐라, 아파 봐라.”, “당신도 늙어 봐라.”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생각보다 많더라. 힘들게 계단을 오르내릴 때 스스럼없이 팔을 붙잡아 부축해 주니 큰 힘이 됐다. 몇 차례 부축해 준 사람은 모두 여성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더 인간적인가 보다. 성도 이름도 모르고 얼굴 기억도 안 나는 그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승강기 차례를 양보해준 사람, 버스 자리를 양보해준 사람, 자리를 양보하며 부축해 앉혀준 사람, 알거나 모르거나 교통약자인 나를 걱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위로해준 사람들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 이제 전보다 더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풀어야겠다. 그게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은혜 갚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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