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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대 Oct 07. 2020

호박은 못난 게 아니다

  옥상 화분에 심은 단 호박 나무가 자라 꽃이 피더니 호박이 열렸다. 작년에 단 호박을 사서 죽을 끓이려고 긁어낸 속을 음식물쓰레기와 함께 묻었더니 호박 못자리가 되었다. 모종 몇 포기를 옥상 화단에 심은 덕에 돈 주고 호박을 사 먹지 않았으니 재미를 톡톡히 본 샘이다.


  금년에도 씨가 섞인 호박 속을 거름용으로 화분에 묻었다. 2~30여 개의 모종이 경쟁하듯 흙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중 실한 모종 몇 포기를 옮겨 심었다. 그다지 공들이지 않았는데도 담장을 타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더니 꽃을 피우고 호박 네 개가 달렸다. 아침이면 활짝 핀 호박꽃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호박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눈길 가는 곳이 탐스런 호박이다. 저녁때 꽃은 다소곳이 입을 다물었다가 아침이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긴다. 꿀벌이라도 날아들 때면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삭막한 도시에서 이만한 즐거움이 어딘가! 수필가 김진섭(1950년 납북)은 ‘농민 예찬’이라는 글에서


  “단 한 포기의 채소일망정 그것을 좁은 뜰 한 구석에 심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이 ‘창조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것이니 (중략) 그것을 상 위에 찬의 한 가지로서 먼저 음식으로 맛보는 즐거움, 이것이 곧 창조하는 기쁨이다.”라 했다.


  호박은 덩굴식물 1년생으로만 알았는데 다년생 호박도 있다 한다. 원산지는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멕시코 남부와 중미지역이 원산지라는 주장이 더 많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후인 1605년 인도와 중국,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호박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전해왔다고 하여 오랑캐를 이르는 호에 박과 비슷하다고 해서 호박이라 지어졌다고 한다. 호박은 크게 나누어 동양 호박, 서양 호박, 페포 호박, 야생 호박, 흑종 호박, 믹 스타 호박 등의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애호박, 밤 호박, 단 호박, 늙은 호박, 땅콩 호박, 돼지호박, 화초호박 등이 있다.


  어릴 적 호박에 대한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맘때면 농촌에 무성하게 자란 호박 줄기를 쉽게 볼 수 있다. 옥토는 다른 농작물에게 다 뺏기고 농사짓기 어려운 밭두렁, 가장자리 자투리땅, 담장 밑 또는 비탈진 언덕이나 버려진 땅이 호박 차지다. 우거진 풀잎 속 호박 줄기는 언제 보아도 기세가 당당하다. 호박잎 속에 감추어져 노랗게 핀 아침 호박꽃은 더없이 청초하다. 꽃 중에 꽃으로 꼽히는 장미꽃처럼 화려하거나 향기롭지 않지만 장미에 돋친 가시가 없다. 피었다 지면 그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참 좋은 선물을 안겨준다. 호박꽃은 농민과 가장 친근한 꽃이다.


  심을 때는 구덩이를 넓고 깊게 판다. 전에는 밑거름으로 인분이 가장 좋았고 퇴비나 계분을 쓰기도 했다. 파종하고 나서 뿌리가 자리를 잡은 뒤에는 무서운 속도로 자란다. 무더운 여름철 가뭄에 강하며 농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라는 무공해 식품이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오랜 시간 자란 호박은 잎이 다 지고 나서도 줄기에 누렇게 달려 뒹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중학생 때쯤이다. 어른들이 논밭에서 일할 때 누나가 없는 나는 호박 국을 끓여 날랐다. 나에게 왜 국을 끓여오라고 했을까! 내가 논밭에서 하는 일이 보기에 시원찮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좀 덜 힘든 일을 시키느라고 그랬는지 고향집에 가면 어머니께 여쭤봐야겠다. 끓이는 방법을 배웠건만 물을 너무 많이 부어 호박 국이 아니라 멀건 된장국이 되기도 했다. 호박에서 물이 그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걸 알고 나서는 내가 끓인 호박국도 제법 맛이 있었다. 호박을 썰어 넣고 물에 된장 풀어 멸치 몇 마리에 마늘만 듬뿍 다져 넣으면 맛은 나게 돼 있더라. 간은 소금이 아니라 간장으로 맞췄던 것으로 기억된다.


  호박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호박 백설기나 시루떡, 호박죽을 비롯하여 범벅, 전, 나물, 즙 등 다양하다. 열매는 물론 잎, 씨, 줄기. 뭐하나 버릴 게 없다. 나는 상추, 들깻잎, 민들레 등으로 쌈을 싸서 잘 먹는다. 호박잎은 살짝 데쳐 꽁보리밥과 끓인 된장으로 쌈 싸 먹는 맛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호박잎 넣고 애호박과 매운 고추 잘게 썰어 넣은 된장국도 참 맛있다. 바다 가까이에서 나고 자란 나는 문득 갈치 회 생각이 난다. 갓 잡아 싱싱한 은 갈치 비늘 제거는 억센 호박잎으로 하는 게 가장 쉽다. 갈치 회에는 다른 식초보다 막걸리로 만든 식초가 그만이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돈다. 늦가을까지 내버려져 말라버린 잎이나 줄기는 고구마와 함께 쇠죽 끓이는데 넣으면 소의 영양식 진수성찬이다.


  호박의 효능이 참 다양한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됐다. 비타민 A, C, E가 많이 들어있어 항산화 작용으로 항암효과, 동맥경화와 노화방지, 면역력 강화에 좋다. 혈액순환, 눈 건강과 중풍, 부인병, 위장질환, 피부미용에도 좋다. 특히 출산 후 부은 몸에는 꿀 넣어 푹 삶은 늙은 호박 이상 좋은 게 없다. 씨 또한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원활한 혈액순환, 혈압조절에 효과가 있다. '늙은 호박은 가을 보약’이라는 말도 있다. 그야말로 호박은 만병통치 건강식품이다. 이렇게 좋은 호박을 온 국민이 많이 먹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호박을 돼지, 메주와 함께 못난이의 대명사처럼 여기다니 호박은 억울하다. 못생긴 것에 비유하거나 부정적으로 쓰이는 속담도 많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이 수박보다 훨씬 사람에게 이롭다. 호박꽃에는 장미꽃에 있는 가시도 없는데 말이다. ‘뒤로 호박씨 깐다’, ‘호박에 말뚝 박기’,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 ‘짚 새기 신고 왔네.’라는 노래에, 사랑이 별거더냐 좋아하면 사랑이지, 이래저래 정이 들면 ‘호박꽃도 꽃이라니까.’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 역시 못난 것을 은근히 비유한다. 하나 호박은 못난 게 아니다. 최대의 행운을 의미하는 ‘호박이 덩굴째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세상만사 둥글둥글 호박 같은 세상 돌고 돌아……’ 하며 노래 '물레방아 인생’에서 모나지 않고 원만함을 이르기도 한다. 호박은 결코 못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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