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둘기에서 21세기의 카카오톡까지.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 8:6 -12)
위 단락은 성경 창세기의 한 부분이다. 노아는 홍수로 잠긴 세상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그의 충실한 비둘기는 기특하게도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날개를 젓는다. 결국 비둘기는 '발붙일 곳'을 찾아내고, 동시에 노아는 대지의 존재를 확인받게 된다. 이렇게 바다를 떠돌던 인류는 육지에 터를 잡게 되고 비둘기에서 출발한 '안부 매개체'는 각 세기마다 진화를 거듭한다.
1. 편지 - 안부의 아날로그화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모든 안부가 편지 하나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편지는 말 대신 자신의 이야길 전달해주는 통로이자, 중요한 정보전달 매개체였다. 편지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종이와 글씨는 '쓰기'와 '읽기'를 의미한다. 이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다. 보기, 듣기, 말하기(소리 내기)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도 가능한 행위이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편지의 강점은 더욱 극대화된다.
부모와 자녀, 친구, 연인, 스승과 제자 등 인간의 편지는 안부를 묻는 문장에서 시작되어 대개 사랑을 맹세하거나 감사를 표하는 것에서 마무리되었다. 편지를 쓸 땐 너나 할 것 없이 아날로그적 감성이 충만해지곤 하는데, 여기서는 '손'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환기시키는 것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대부분의 아날로그적 감성은 기계를 빌리지 않고 직접 나선 인간의 손에서 탄생된다. 발신인이 그 자리에서 직접 수신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거나 수령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등의 단점이 있지만, 이를 능가하는 '안부'의 형상화가 없었기에 그 정도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 과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종이와 펜은 풍전등화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2. 메일 - 안부의 디지털화
어느 날, 인류는 '컴퓨터'라는 것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컴퓨터의 기세에 편지 또한 자신의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편지의 형식'이 컴퓨터 속으로 스며들어 소멸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부 묻기'는 흰 종이와 펜을 거쳐 직사각형의 하얀 화면과 깜빡이는 커서로 모습을 바꾸었다. '메일'이 대세가 되면서 수발신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이전의 펜글씨와 종이는 깔끔함과 견고함을 갖추어 사용자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을 쓰는 공간에는 알파벳으로 만들어진 메일 주소가 들어앉았고, 저마다의 필체는 굴림체나 돋음체 등 몇 개의 글씨체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안부는 눈앞에 보이고, 손안에 잡히는 유형이었다가 직접적으로 만져질 수 없는 쉽고 빠른 무형으로 변모하였다. 어떤 이는 그 편리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고 또 다른 이는 '편지'만이 낼 수 있는 아날로그적 감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이 변화에 점차 적응해갈 무렵, 인류는 다시 변신을 꾀하는 안부의 틀을 목격한다.
3. 카카오톡 또는 SNS - 안부의 스마트화
스마트폰이란, 이전의 휴대폰에서 발전된 단어로 '똑똑한 전화기'를 뜻하는 단어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특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똑똑하다', '영리하다'. 일반적으로 생명이 있는 대상을 수식할 때 쓰이는 말이다. '철수는 똑똑하다', '철수네 강아지 멍멍이는 영리하다' 정도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인간이 똑똑해질수록 그러한 인간이 만드는 기계는 그 '똑똑함'을 뛰어 넘어갔다. 인간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기계는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수투성이인 인간이 만들었는데 실수하지 않는 기계라니.
안부를 전하는 기기가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그와 공생하는 매개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민 어플이라고 불리는 카카오톡과 대표적인 SNS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은 그들의 우두머리 격이 된 예이다. 덕분에 이제는 글자뿐만 아니라 사진, 동영상 등 모든 콘텐츠가 '안부'역할을 하는 추세이다. 또 이들은 실제 날개를 단 비둘기보다 빠른 속도로 발신인과 수신인 사이를 오간다. 이 똑똑한 것들에게 '사이'나 '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부를 묻는 동시에 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간 인류가 걸어온 궤적들을 살피다 보면 '진화'라는 것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겠다 싶을 때 뒤통수를 때리며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안부의 매개체도 마찬가지다. 아주 먼 옛날, 노아는 메일이나 카카오톡, 페이스북을 감히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당시 그에게는 비둘기가 최대의 최선책이었으니까. 방주 안에서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이 가능했다면 인류는 꼼수를 쓰다가 더 큰 홍수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태어난 이상 평생 '안부'를 묻고 답하며 살아간다. 상대는 때와 장소에 따라 세상으로, 타인으로, 자신으로 시시각각 변하지만, 그것의 속성만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부지런히, 때로는 게으르게 '글'을 통해 안부를 주고받을 작정이다. 감람나무 잎을 물어 나르던 비둘기나, 쉬지 않고 알람을 울려대는 카카오톡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