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쓰인 배경을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과거 니체가 기획했던 바그너의 바이로이트 축제 리허설 도중 니체는 바그너에 대한 지나친 숭배 분위기의 축제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 후 볼테르의 집에서 바로 이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일부를 작성했는데 이로 인해 바그너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가 니체의 철학적 세계에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서 볼테르로, 형이상학적 관념에서 자유의지로 넘어가는 과도기와 같은 시기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푹 빠진 바그너의 음악에서 조차 니체는 회의감이 들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니체에게 이 책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철학, 새로운 사상으로의 발돋움이었을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의 가치관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며, 신념을 꺾는다는 것은 본인에게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다가올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니체에게 고정된 신념은 가장 무서운 존재였고 좀 더 나은 세계로 건너갈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바로 그의 이 ‘자유정신’을 집약해 놓은 것이 바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다.
: 어떤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를 근거로 그에게서 예상할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은 가치의 전도를 최고의 존엄으로 여긴다. 우리가 의심할 생각도 들지 않는 기존의 관념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부순다. 관념들, 그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근거가 없다. 근거의 무근거성.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할 때 근거들(국가, 법, 신앙, 도덕 등)을 기준으로 그 일이 합리적인지 혹은 도덕적으로 옳은지,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판단하게 되는데 사실 이처럼 우리가 판단하는 와중에 사용하고 또 사용되는 것들은 정작 근거가 없다. 즉,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절대적 원리가 필요했거나 어떤 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단지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자들의 임의적인 동의만 존재했을 뿐이다. 헌법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법이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사실 법 또한 임의적인 우리의 합의일 뿐인 것이며, 이러한 생각이 드는 시점부터는 법은 한없이 작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근거들은 우리 생활에 큰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데 이 힘의 원천에 대해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 근거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거부될 때만 힘과 영속성을 가진다. 속박된 정신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속박된 정신은 아마 그것이 치부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가치의 기준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그 그것을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소홀했다. 설령 순수한 아이가 “왜?”라고 물을 때면 적절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부모들은 대답을 회피하거나 꾸지람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속박되고 옥죄어 큰 우리 안에 갇히게 되고 마는 것이며 그것은 ‘습관의 우리’로,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서 받아들인다. 근거 없이 정신적 원칙들에 습관화되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언제나 ‘천재’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우리가 더욱 옥죄일수록 천재의 출현 가능성도 높다. 그들은 근거를 찾을 것이고 신앙적이기보다 학문적이고 파괴하고 싸우며 새로운 문화를 열 것이다.
우리의 문화는 끊임없는 ‘진보’를 거듭해 왔다. 분명 세상은 지독히도 발전하고 좋아진 것 같은데 무언가 버겁고 지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 모를 이 기분 나쁜 ‘진보’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신경력과 사고력의 과도한 자극이 일반적인 위험이 될 정도로, 감정, 지식, 체험의 총량 즉 문화의 전체적인 부담이 대단히 커져버렸다. 사람들은 오늘날 온갖 방법을 써 건강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로 남는 것은 감정의 긴장 상태와 저 문화의 압박하는 짐을 경감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살면서 너무 많은 문화를 마주하게 되고 각자의 문화 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좀 더 높은 문화와 좀 더 낮은 문화는 분명히 존재한다. 속박된 정신에 의한 거대한 낮은 문화와 자유정신들이 싸워 일궈낸 좀 더 높은 문화가 양립한다.
좀 더 낮은 문화의 사람들은 활동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직업, 혹은 하는 활동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활동적일 뿐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태만하다. 명상과 사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내온 예로 들자면 은행가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왜 돈을 그렇게 열성적으로 모으는지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들은 단지 굴러가는 돌을 따라 구를 뿐이다. 명상적인 요소가 결여될 때 발현하는 성질이 바로 ‘활동’인 것이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자신도 느끼고 있는 빠져 있는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활동적인 인간’이 되고 눈앞의 즐거움에 현혹된다. 그럴수록 점점 더 나태해지는 것이다. 조급하고 성급한 삶의 지름길이다.
좀 더 높은 문화는 끊임없는 투쟁이다. 낮은 문화의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그들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설득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견해는 다수에 의해 오해되기 일쑤다. 자기 자신, 사회의 모든 것과 싸워야 하는 그들이 행복을 느끼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번 높은 문화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으며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단지 긴 투쟁을 위해 긴 호흡을 가져간다. 그들의 긴 호흡은 조용해 보이지만 속은 타오르는 전쟁터와 같다. 그들의 열정은 무언가를 성취해 내는 데 탁월하다. 그들이 체험했던 모든 경험과 사색, 명상, 실수, 사랑, 우정 모든 종류의 체험은 그 안에서 타오르고 마침에 꽃을 피우게 된다. 이것이 그들의 걸음걸이에 힘을 더해 주고 발끝에는 부드러운 산뜻함마저 느끼게 한다.
“더 낮은 문화 앞에서 감동하고 자기를 동정하는 일은 더 높은 문화의 표시이다: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좀 더 높은 문화에 의해서는 어쨌든 행복이 커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삶에서 행복과 안일을 수확하려는 사람은 항상 좀 더 높은 문화를 피하려 할 것이다.”
사실 한 인간이 높은 문화 혹은 낮은 문화에서 살게 되는 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교육일 것이다. 한 어린아이의 지성이 속박된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면 그 아이는 수많은 미래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속박된 문화에서도 옳은 길이 존재한다. 법, 사회 규범, 도덕 등이 그 길을 인도하지만 그 길은 최소의 가능성만을 열어 둔 옳은 길이지만.
“개인은 마치 자신을 교육하는 교육자에 의해, 마치 그가 확실히 어떤 새로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반복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다루어진다. 사람들은 이미 있었던 존재에 의한 구속성이 어린아이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좋은 성격이라고 부른다.”
이 책을 내 글 솜씨로 표현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니체는 이 책의 가제를 [쟁기날]이라고 정했었다고 한다. 땅을 깊숙이 파고 흙을 뒤엎는 쟁기날. 자유정신과 높은 문화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비유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