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크눌프>
5월에 올리게 된 4월의 책
크눌프
4월에는 독후감을 밀리지 말고자 편법을 썼다. '지와 사랑' 뒤에 80페이지 남짓 붙은 '크눌프'다. 취준이다 뭐다 핑계로 이번 달에는 두꺼운 책을 도전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 가볍게 힘을 빼고 읽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크눌프에서의 헤세는 ‘지와 사랑’이나 ‘황야의 이리’ 혹은 ‘싯다르타’에서 보였던 인물의 내면적 고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담담하게 크눌프에 대해 써 내려간다. <크눌프>는 헤세가 정말 소중하게 여겼던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그의 고향 칼프에 가면 크눌프의 동상이 있는데 작품 캐릭터 중 유일하게 동상으로 남았다고 한다.
책 속에서 크눌프는 이미 이리였다. 그가 가진 자유를 온몸으로 느낄 줄 알았으며 순간순간 자유의 충동에 거스르지 않고 아름다운 순간 속에 살았다. 이런 이리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표출되는 것은 동정이다. 나이가 찼음에도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으로 떠도는 모습에 대한 안쓰러움과 혀를 끌끌 차게 되는 모습. 우리도 마찬가지다 길에서 마주치는 번듯하지 못한 어른들을 바라볼 때의 동정과 연민의 시선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크눌프를 반가워한다. 사실 반가움을 넘어 크눌프라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사람이 크눌프이기 때문이다. 그가 풍기는 특유의 자유로운 방랑자 분위기는 동정이나 연민 따위의 감정은 가볍게 뭉개 버리고 그가 가진 특유의 유머스러움과 쾌활한 자유가 그들을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크눌프와 있으면서 즐거워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지지 못했던 자유, 선택해야만 했던 현재의 삶에서 대리만족 정도의 감정, 아이 같은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순수한 미소일 것이다. 크눌프의 모습에서 한 때 자신들이 젊은 시절 가졌던 모습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싯다르타, 하리와는 다르게 크눌프에게 인간으로의 몰락은 없었다. 단지 눈 위에서 눈감을 뿐이었는데 크눌프의 마지막은 지극히 초라해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다. 모든 것을 잘할 줄 알고 표출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원한다면 일에서 성공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유가 더 값졌을 뿐이었겠지. 이리의 삶을 택한 사람에게는 숙명적인 결말일지도 모르지만 마지막 신과의 대화에서 나타나듯이 그에게는 자유에 대한 향수가 있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만 동시에 사랑받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의 그대를 달리 만들 수가 없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방랑하였고 편안히 안주해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유에 대한 향수를 일깨워 주었다. 또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그대 속에 있던 나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또한 사랑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이었기 때문에 그대가 맛보고 겪었던 모든 괴로움을 나 역시 똑같이 체험한 것이다.”
“네.” 크눌프는 대답하며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
이리와 개. 같은 과에 속하는 동물이니만큼 너무 닮지만 너무 다르다. 겉모습만 생각해봐도 야생의 이리와 반려견으로써의 개는 천차만별이다. 주인이 풀어줄 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지만 따뜻한 집과 밥, 그리고 가정에서의 사랑을 택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어쩌면 이 모든 굴레를 끊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굶더라도 사슴의 따뜻한 피를 맛보고야 마는 이리가 돌연변이 일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이 없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질 뿐이다. 실제 개의 탈을 쓰고 유머로 웃음 짓는 이리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교만에 빠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