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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혁 May 04. 2020

이리로 살아간다는 것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한 달에 한 권씩 독후감을 써보려고 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이 또한 변명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번 달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싶었는데 몇 자 읽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다. 게다가

순식간에 흥미도 뚝 떨어져 버려 며칠 동안은 책을 펴보지도 않았다. 나는 영락없는 이과생 인가.

그래도 이번 달 안에 독후감을 써보려고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헤르만 헤세 책으로 가보기로 했다.

이 또한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헤세.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골드문트와 나르찌스', '싯다르타' 그리고 '황야의 이리'

헤르만 헤세의 책만 세 권째다. 어느 작가의 책을 이렇게 연달아 찾아서 읽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데미안'은 아직이다. '수레바퀴 아래서'도 읽었던 것 같은데 가물가물.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27년 차 인생을 더 뒤엎어 주어서 고맙다.

이리로 시민과 살아간다는 것

이리: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판사, 의사, 구두장이, 교사인 것처럼 그렇게 영웅이거나 예술가이거나 사상가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삶은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듯이 영원하고 덧없는 운동이어서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분열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카오스 위에서 빛나는 저 희귀한 체험과 행위와 사상과 작품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 한, 이들의 삶은 끔찍스럽고 무의미하다.]


  헤세의 모든 책에는 인간 내부에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자아가 잘 묘사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고독감과 처절한 내부 분열은 그가 어떻게 느끼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경험해보지 않고는 절대로 서술할 수 없는 깊은 심연을 그대로 내보인다. 절대 글로만 읽어서는 알 수 없다. 헤세의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 삶을 이 책에 녹여낸 듯싶다. 불안정하고 짧았던 두 번의 결혼 생활과 고독 그리고 우울. 하리가 가졌던 면도칼이 결국 그의 손에도 있었으리라.


  세 작품에서 당연하게도 나타나는 특징은 고독이다. 단순히 외로움을 넘어선 고독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 하지만 여기서 나타나는 고독의 특징은 외로움이란 감정 자체가 다른 사람에 대한 필요에 의해 생기지 않는 고독이다. 그리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고독도 아니다. 깨우치고 건너가려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고독이다. 그 감정, 느낌, 사상에 대해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 '황야의 이리'가 아니지 않을까.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 자신의 개성 즉, 한 단계 깨어 있는 인간으로서의 개성과 시민성을 떨어뜨려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는 바로 이리가 된다. 충동적이고 길들여지지 않고 문화 따위는 모르는 이리로. 나머지는 몽땅 하급 인간 취급을 하며 짐짝 치우듯 마음 한구석으로 몰아버린다. 매우 위태롭고 부끄러운 실수지만 모두가 한 번씩 거쳐갔으면 좋겠다.


  지금 생각하면 몇 년 전의 나도 매우 공격적이었다. 니체를 좋아했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멋들어진 사람이고 싶었고 단지 그래 보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리를 바라보는 내가 좋았다. 이리만이 고귀한 존재였고 고독 속에 살아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한탄보다 나에 대한 우월감에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리로의 완전한 몰락은 불가능하다. 별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 실제 생활 영역에 단단히 얽혀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바보같이 우스운 꼴이다. 내가 저지른 가장 바보 같은 실수는 나를 이리와 시민 단 두 가지로 만 정의해 버린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 우리 안에는 수만 가지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렇게 단 두 개성으로 나를 정의해 버린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 그리도 내가 밀어나 버린 시민성이라는 것에 상당한 양의 사랑과 배움이 깃들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그 싱싱한 열매들은 악취를 시민성이라는 썩은 상자에서 악취를 풍기며 존재한다. 그 열매를 따기 위해 코를 막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오십 년을 이리로 살아온 하리는 몰락한다. 사람들 속으로 끝없이 떨어져 본다. 거기에서 무수한 모습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모두가 사랑스럽다.

동시에 혐오스럽다. 떨어지고 나서도 끝없이 이리를 동경한다. 사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이런 감정들이 오고 간다. 이리는 보통 사람들의 사랑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삶을 살지 못한다. 동시에 동경하고 그리워한다. 사람들은 이리는 결코 하지 못할 사랑할 줄 알고 정열적일 줄 알고 온 힘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바보 같다. 그래서 그들과 차마 섞일 마음은 없다. 다시 외로워진다. 하리가 항상 마음에 품은 면도칼은 언제든 그의 목을 그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은 과거나 미래나 변화가 없어서, 시간과 세계, 돈과 권력은 하찮은 자, 평범한 자들의 것이 되고 본래의 진정한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는 게 없지요. 죽음 외에는 말이지요."


이 끊임없는 고독과 방황 속에서 헤세가 제시한 처방전이 참으로 재미있다. '유머'이다. 유머? 유머!

시민성 따위는 웃어넘겨 버리는 유머! 죽음의 문턱에서도 할 수 있는 그런 유머!

이런 유머를 가질 때 우리는 이리이면서 동시에 늑대의 탈을 감추고 감쪽같이 사람들과 어우러져 웃고 떠들고 마실 수 있다. 굳이 똑똑한 척, 깨어 있는 척할 필요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차피 그들은 이해할 수도 없다. 사실 이리들 모두가 안다. 이 또한 도피 책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위인이 되지 못할 이리들에게는 최고의 처방전일 수 있다. 논지는 이렇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성능이 안 좋은 라디오를 통해 시끄러운 바 안에 울려 퍼진다. 아름다운 음악의 외형은 바뀐다. 라디오에 의해 이리저리 깎이고 사람들의 소리에 묻힌다. 그래도 알 사람은 안다. 저 아름다운 곡조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이었는지. 사실 꽤 효과적일 수 있는 생각일 거 같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이리들이 원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단지 영원성이다. 어쩌면 영원한 이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대견함. 우리 마음에 있는 별을 지울 수는 없다. 단지 중요한 것 별 그뿐이다. 별이 빛나고만 있다면 아무렴 어떠랴.

방 한구석에 붙여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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