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Day 3] 맥시멀리스트의 미니멀 스리랑카 여행

by Sun

아침에 일어나 피두랑갈라를 갈지 고민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건 꼭 봐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 것 같았다. 어제 하루를 부지런하고 알차게 보냈으니, 오늘은 조금 더 여유롭게 쉬어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며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읽었다. 내전 중인 소설 속의 상황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지금 이곳이 정말 같은 나라인가 생각했다. 이런 시간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여전히 이런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순수하게 살아낼 수 있는 걸까.


아침을 먹고 나서는 담불라Dambulla에 있는 절을 구경할지 생각했다. 하지만 픽미PickMe로 툭툭이 잡히지 않았다. 길에 있는 차들을 예약해서 가려면 아무래도 앱을 통해 예약하는 것보다는 비쌀테다. 지금 여기서 사용해야 하는 돈과 또 내일 듀란의 차를 타고 먼 길을 갈 때 필요한 경비 등을 생각하면 현금이 더 필요했다. 트래블월렛은 스리랑카 루피를 지원하지 않아서 현금 인출도 어려웠다. 달러를 가지고 가서 환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는 환전해 주지 않아서 구글맵에 검색했더니 환전소가 나왔다.


카페에 가는 길


겨우 오전 아홉 시 반이 조금 넘었는데 뙤약볕이 쏟아졌다. 2차선 도로 양쪽으로 따로 인도는 없다. 조심히 걸어서 환전소가 있다는 방향으로 걸었다. 시기리야에서는 시기리야 락을 다른 방향에서 보게 되었다. 어느 방향이든 멋지다. 지도에서 환전소라고 표시된 곳에 도착했지만, 환전소는 없었다. 그래서 담불라에 가는 것은 포기하기로 하고 그냥 근처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카페 이름은 미스터 카페인 카페. 카페에 도착해서 밀크셰이크를 시켰다.


여행 중 꼭 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엽서 쓰기. 어제 시기리야 락에서 내려와 구매한 엽서를 챙겨 나오기도 했다. 총 세장 중 하나는 나에게 보내는 것이고, 나머지 둘은 누구에게 보낼지 고민했다. 하나는 종종 엽서를 보내는 M에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처음 엽서를 보내는 J에게 쓰기로 했다. 꼭 마음에 드는 엽서는 아니지만 시기리야가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이니까 됐다.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엽서를 쓰다 보면 말이 길어진다.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을 바라보는 자리에서 시원한 밀크셰이크를 마시며 엽서를 쓰는 일은 마치 새로운 차원에서 내가 떠나온 차원을 연결 짓는 것 같다. 아마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그 세계에 이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보낸다는 마음으로 글을 담았다.



할 일이 없다는 사실에 조급해지지 않고 여유를 즐기기는 약간의 연습이 필요하다. 시간을 채우려 쿠킹 클래스라도 가볼까 하고 들여다보던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다시 8-90년대의 스리랑카 이야기로 뛰어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우체국에 다녀왔다. 공휴일이지만 우체국은 열려있었다. 한국, 홍콩, 싱가포르로 각각 엽서를 보내려 한다고 하자 직원분이 어디선가 두꺼운 책자를 꺼내 왔다. 다양한 우표가 들어있는 앨범 같은 책자였다. 여러 장을 뒤적여 겨우 찾아낸 우표 - 국제 엽서는 어디로 보내든 상관없이 모두 70루피라고 했다. 엽서가 국제미아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우체통에 넣었다.


만화에 나올 것 같은 우체통


호텔로 돌아와서는 다시 수영하고 책을 읽고 언덕에 올라 오래도록 노을을 봤다. 직장인에게 휴가 하루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모든 것에서 멀어져 아주 느긋하게 보낸 하루가 몇 번의 평범한 주말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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