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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Feb 02. 2022

작별하지 않는다

책 읽기 프로젝트 50 #4

<작별하지 않는다> by 한강 (문학동네, 2021)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간다. 일제강점기에 핍박받고 살아가던 이들에 대한 기억이 그렇고,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내어놓고 싸우던 이들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또 일제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은 이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이들에 대한 기록이, 결국 싸워서 지고, 이겼던 이들에 대한 기억이 그렇다.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서 그린 광주 민주화 운동이,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쓴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모든 걸 쉽게 잊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주인공 경하의 꿈속 장면으로 시작한다. 경하는 4년 전 ‘그 도시’에 관한 책을 썼고, 그 이후로 같은 꿈을 계속 꿨다. ‘그 도시’에 관한 책을 쓰면서 여러 자료를 조사했다. 자신의 삶과 글을 쓰는 일을 분리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책을 쓴 이후로 많은 것들과 작별했다. 하지만 바닷가에 심겨 있는 검은 통나무 위에 눈송이가 쌓여 있고, 이내 바닷물이 차오르는 꿈, 그 꿈 만은 계속되었다. 그렇게 경하는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친구 인선의 연락을 받는다. 제주에 살고 있는 그녀는 집에서 가구를 만들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 집에 가서 앵무새를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경하는 제주에 갔다. 폭설이 내리고 있는 그곳에서 아주 어렵게 인선의 집을 찾아간다. 하얗게 눈이 쌓여 고요한 그곳에서 경하는 꿈인 듯 생시인 듯 인선에게 그녀의, 그리고 그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알려지지 않은 그 이야기를 오랫동안 자세하게 듣는다.


이런 글을 쓰는 작가는 마음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 문득 걱정이 되었다. 주인공 경하가 표현한 칼날 위의 달팽이처럼, 위태위태하고, 생채기 가득한 그 마음이 무엇으로 위로받을지, 멀리서 닿을 수 없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을 한강 작가는 우리에게 이렇게—경하의 삶이 무너지는 방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102/311


경하는 인선의 입에서, 그리고 인선은 인선의 어머니로부터 그 시절의 증언을 듣는다. 덤덤한 제주 방언으로 적어 내려 간 잔인한 기억이 바다에 한가득 떠있는 옷가지들로, 얼굴에 쌓인 녹지 않는 눈의 잔상으로 남았다.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중략)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어영허게 묻엉으네...... 내가 새벡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았그네. p80-84/311


익숙하지 않은 제주 방언으로 표시된 말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 말이 곧 인선 어머니의 목소리로 내 귓가에 맴돈다. 한강 작가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지나치게 생생한 묘사에 책을 읽어 내려가기가 힘든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잘 모르고 있던 이 사건을 마치 지금 내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또 대화체에 따로 따옴표도 사용하지 않아서 대화인지 생각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그 증언이, 대화가 더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책은 꿈이면서 생시인, 죽어있으면서 살이 있는, 사람이면서도 혼(魂)인 상태가 아니면 온전히 이어나갈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실재하지만 내 손에 닿아 녹기 전까지는 아무 느낌도 없는 눈처럼. 그런 상태가 아니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아픈 이 이야기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고 했다. 나 또한 그렇다.


*페이지는 전자책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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