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국가대표의 변(辯)
때는 바야흐로 섣달그믐, 각 한국, 중국, 싱가포르 그리고 일본에서 온 네 사람이 만두 빚기 대결을 하게 되었으니...
예년 같으면 고향에서 각자 설과 춘절을 보낼 세 사람이 코로나 시국으로 홍콩에 갇히게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저녁 6시 이후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어 한 친구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합류하게 된 (설 명절과는 관련이 없는) 일본 친구까지. 그렇게 섣달그믐을 먹부림으로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홍콩 사람들의 명절 음식인 푼초이(Poon Choi, 盆菜)다. 푼초이는 솥이나 냄비에 각양각색의 재료를 층층이 쌓아 육수를 넣어 먹는 음식으로, 설에 가족들이 모이면 많이 먹는 음식으로 꼽힌다. 물론 우리는 모두 홍콩(혹은 광동) 출신이 아니고, 이 정도 대규모 요리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없으므로 시켜먹기로 했다.
싱가포르 출신의 X가 주문한 푼초이는 알고 보니 아주 민주적인 음식이었다. 넷이서 싸우지 말고 먹으라는 뜻인지 전복도 네 개, 새우도 네 개, 해삼도 네 개, 돼지고기도 네 조각, 유부도 네 점... 알배추는 조금 더 넉넉하게 들어있었다.
집주인인 베이징 출신 Y는 중국식 오이무침인 파이황과(拍黄瓜)--정말 오이를 칼로 때려서 만들었다--와 들깨소스 샐러드를 만들었고, 한국인인 나는 막걸리 한 병과 파전, 김치전을 사 갔다. 이 모든 걸 먹었지만 여전히 부족해 다른 음식을 더 주문해 먹었다.
그리고 섣달그믐, 중국에서는 추시(除夕)라고 부르는 이 밤의 메인이벤트, 만두 빚기를 시작했다. 중국 북방 지역에서는 추시에 꼭 만두를 빚고 12시가 되면 만두를 먹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Y는 만두 빚기 경력이 20+년이 된 달인이다. X가 부추를 찹찹 썰고 Y는 고기에 그 부추를 섞고 간을 해 만두소를 만들었다. 근처 시장에서 사 온 만두피까지 꺼내 놓으면 준비 완료.
손가락으로 물을 한 방울 콕 찍어 동그란 만두피 가장자리에 바른다. 이게 나중에 접착제 역할을 해준다. 가운데 만두소를 적당량 넣고 끝을 붙이기 시작한다. 만두소가 너무 적으면 나중에 요리했을 때 쪼글쪼글하고 맛이 심심할 테고, 만두소가 너무 많으면 옆구리가 터질 테다. 만두 끝을 붙일 때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내용물이 새어 나와 맛을 잃게 된다.
일본에서 온 R이 만두를 빚기 시작하며 말했다. "우리 다 다른 나라에서 왔으니 나라별로 다른 만두 모양을 볼 수 있겠네"
그러자 X가 말했다. "뭐야, 그럼 이거 만두 빚기 시합이야? 우리 국가대표네?"
Y는 상황을 정리하려 말했다. "시합이 아니라 워크숍이야. 만두 빚기 워크숍"
그리고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만두를 별로 빚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크숍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말이 나온 이상 국가대항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Y는 바깥쪽으로 주름이 예쁘게 잡아, 속이 꽉 찬 만두를 뚝딱 빚어냈다. R은 일정한 간격으로 주름이 잡힌 정교한 만두를 수준급으로 만들었다. 그 사이 내가 만든 것은.. 웬 주먹도끼 같은 반달 모양의 만두였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로 만두의 끝과 끝을 이어 붙여 동그랗게 말아 왕만두 스타일로 원래 만두의 못생김을 감추어 보기도 했다.
R이 동그란 만두를 보고 외쳤다. "오! 이게 한국 스타일이야?"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이걸 한국 스타일 만두라고 생각하지 마. 이따위 실력으로 난 한국을 대표할 수 없어..."
Y와 R은 나와 X에게 시범을 보여줬다. X와 나는 따라 만들기 시작했으나 결과물은 여전히 극명하게 차이가 났다.
결국 우리는 승자를 결정짓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다는 건 명확했다. 비공식 국가대표지만 국민들께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종목으로 다시 참가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만두를 제일 맛있게 먹는 것으로 이겼다. 우리는 먹방의 민족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