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모르는 홍콩
홍콩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어떤 사람은 침사추이 스타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홍콩섬의 스카이 라인을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몽콕 여인가의 야시장을 떠올릴 것이다. 침사추이 거리에 주렁주렁 달린 한자로 쓰인 큰 간판들이나 빨간 택시, 이층 버스 등이 먼저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빅토리아 피크에서 한눈에 홍콩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떠올리기도 할 테다.
센트럴 빌딩 숲 사이로 출퇴근을 하는 나에게 평일의 홍콩은 그저 도시다. 사람 많고 바쁘게 움직이는 회색도시. 하지만 주말이 되면 달라진다. 조금만 가면 빌딩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산속 산책로가 나오고, 도심에서 3-40분만 가면 탁 트인 바다와 등산로 초입 간이 화장실 이외에는 아무 건물도 없는 산에 갈 수도 있다.
홍콩 정부의 2020년 토지 분석을 보면 사람이 사는 거주지역(Residential)은 홍콩 전체 면적의 3.9%밖에 되지 않는다. 상업, 공업, 공공용지를 포함하면 25% 남짓이다. 나머지는 산, 바다, 들판. 그래서 홍콩에는 생각보다 국립공원, 보호지역 등이 많고, 멋진 등산로도 아주 많다. 그래서일까? 홍콩에는 주말에 가벼운 하이킹을 다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홍콩에 처음 왔을 때, 친구들이 함께 하이킹을 가자고 해서 조금 의아했다. 심지어 등산을 다니지 않더라도 아웃도어 용품을 하나씩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친구에게 등산 가자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삭막한 도시에서 하이킹이라니?
처음 친구들과 등산을 갔을 때, 몇몇은 반바지를 입고 날렵한 러닝화를 신고 있었다. 레깅스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산에 오르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상상하던 등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홍콩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가벼운 차림새에 비해 등산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자주 멈춰야 했다. 하지만 산에 오른 후 본 풍경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후로 등산은 내게 일상이 되었다. 너무 무더워서 목숨을 내놓고 걸어야 할 것 같은 6월부터 9월까지의 기간에는 주말 아침 일찍, 뒷산을 올라 빅토리아 피크에 간다. 빠르게 걸으면 왕복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나머지 기간에는 하이킹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경치 좋은 루트를 찾아 나선다. 정부 웹사이트, 그리고 개인 블로그 등 등산로 정보를 아주 꼼꼼히 기록해놓아서 난이도나 거리, 시간에 따라 골라갈 수도 있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고 여러 활동에 제약이 늘어났다. 다만 야외에서 운동을 하는 것은 가능했기 때문에 조깅을 하거나, 공원에서 복싱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보였다. 등산도 예외는 아니다. 탁 트인 풍경을 보면서 잠시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시간--홍콩 정부가 야외에서 운동을 할 때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고 발표함--이 더없이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그리고 여행도 못 가니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을 테고.
무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던 11월의 어느 날, 싱가포르에서 온 X와 함께 하이킹을 가기로 했다. 홍콩섬 센트럴에서 파란색 지하철을 타고 가다 노스 포인트에서 보라색 라인으로 갈아타서 몇 정거장을 더 가면 정관오라는 동네가 나온다. 갑갑한 홍콩섬과는 달리 신도시 느낌이 이 동네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조금만 더 가면 클리어 워터 베이(Clear Water Bay) 지역인데, 이름에서 느껴지듯 맑은 바다 풍경이 보이는 곳이다. 하이 정크 피크(High Junk Peak)는 이곳에 있다. 하이 정크 피크의 중국어 이름은 釣魚翁(조어옹)인데, 글자 그대로는 낚시꾼이라는 뜻이지만 물총새를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산 모양이 마치 물총새의 부리처럼 뾰족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빨간 경고 표지판이 서있다. 위험하니 자신이 안전을 스스로 책임지라는 표시다. 많은 이들이 그 경고를 지나쳐 간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가는 걸 보니 오르지 못할 만한 산은 아닌가 보다. 가파른 길을 걸어 올랐다. 짧은 길이었지만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하이 정크 피크에 도착한 줄 알았지만 옛날 유머집에서 본 한마디가 떠올랐다. "이 산이 아닌가벼?" 눈앞에 뾰족하게 생긴 산이 누가 봐도 "내가 하이 정크 피크요!"하고 서있는 것이다. 구글맵에서는 저곳까지 15분이면 갈 수 있다고 나왔지만 과연... 산봉우리에 오르는 동안 스마트 워치에 표시되는 심박수가 치솟았다.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이 더 쉬울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그것도 자신이 없었다. 산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자 그 힘들었던 과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탁 트인 뷰에 이름처럼 맑은 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잠시 쉬면서 경치를 감상하다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도 가팔라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산봉우리에서 내려오면 다시 완만한 산책로가 연결되는데, 다시 한 시간을 걸어 조그만 어촌 마을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버스정류장 쪽으로 연결되는 길로 내려와 시내로 돌아올 수도 있다. 어촌 마을까지 가지 않는다면 두 시간 이내로 끝낼 수 있는 하이킹이라 주말 오전에도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홍콩에서 가장 힘든 하이킹 코스가 어디냐고 물으면 샤프 피크(Sharp Peak, 蚺蛇尖)라는 대답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샤프 피크는 사이쿵(Sai Kung, 西貢)에 있는 산으로 홍콩에서 뾰족하기로 유명한 산 중에도 가장 어려운 코스로 손꼽힌다. 사이쿵은 홍콩의 어촌 마을과 섬, 그리고 여러 하이킹 루트가 모여있는 곳이다. 쉬운 코스부터 어려운 코스까지 다양하게 있고, 하이킹을 마친 후 사이쿵 부둣가로 가서 해산물을 먹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난이도 별 네 개 이상의 하이킹 코스는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해서 그간 샤프 피크에는 도전할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12월의 어느 날, X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X는 사이쿵에서도 어렵기로 소문난 샤프 피크를 골랐다. X의 친구와 친구의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아침 일찍 지하철역에서 만났다. 샤프 피크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거나, 택시를 타고 가야 했다. 우리는 본격적인 하이킹을 위한 체력을 비축해두기 위해서 택시를 탔다. 등산로 초입으로 가는 길은 완만했다. 캠핑 장비를 짊어진 사람들도 종종 보여서 샤프 피크의 명성이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그 사람들은 샤프 피크에 오르지 않았다) 샤프 피크로 올라가는 샛길 앞에는 (역시나) 빨간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그 경고판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샛길 계단을 올랐다. 샤프 피크로 가는 길에 그런 경고판이 두 개나 더 있었다.
정상을 향하는 길은 정말 가팔랐다. 어떤 구간에서는 정말 두 손 두 발을 다 써서 올라가야 했다. 그런 구간에서는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람이 꽤 많아서 우리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올라갔다. 산을 오르며 국립공원 내에 있는 산들로 연결된 길이 많이 보였다. 해변으로 연결되는 길, 그리고 더 깊은 산으로 연결되는 길. 샤프 피크로 오르기 전 봤던 캠핑족들은 아마도 해변으로 간 것 같았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의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멀리 보이는 사람 없는 해변들과 산등성이로 이어진 길들. 원한다면 더 멀리도 갈 수 있다. 멋진 경치를 보며 내가 해냈다는 마음과 동시에 내려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우리는 사이쿵 부둣가로 가서 해산물을 먹을 생각을 하며 힘을 내어 다시 내려갔다. 멋진 산행을 함께한 사람들과 맛있는 해산물을 먹으며 그날 하루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다음엔 등산 빼고 해산물만 먹으러 오자"
X가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로 돌아가게 되었다. 싱가포르로 돌아가기 전, 홍콩의 뾰족산 삼대장(香港三尖)을 정복하고 싶다고 했다. 그중 두 곳을 함께 갔으니 마지막으로 남은 한 곳도 함께 하자고 말이다. 캐슬 피크(Castle Peak, 青山)는 앞선 두 곳과는 반대로 홍콩 서쪽 끝 튠문(Tuen Mun, 屯門)에 있다. 병풍처럼 서있는 산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캐슬 피크다. 다른 두 산과 달리 캐슬 피크는 국립공원에 있지 않다. 그래서 다른 곳에 비해 가기도 편하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다른 곳과 다르다.
캐스 피크를 올라가는 길은 엄청난 계단의 연속이었다. 홍콩의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각종 체육시설이 문을 닫은 지 3주쯤 되었을 때라 그런지, 아니면 그냥 내 체력이 떨어진 것인지 계단을 오르다 몇 번이나 별을 봤다.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계속 오르다 보면 어느새 튠문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한 시간이 더 지나고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전파 송신탑이 있고, 거기서 튠문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쪽과 반대쪽으로는 색다른 풍경이 보인다. 이곳은 화강암 표면이 드러난 산세로 종종 스케일이 작은 그랜드 캐년에 비교되기도 하는데, 홍콩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캐슬 피크까지 올라가는 계단을 지난 후로는 길이 조금 가파르거나 미끄러운 구간도 있었지만 많이 힘들지 않았다. 파인애플 힐 쪽으로 가는 길에는 중국 선전(深圳)이 보였다. 하지만 계단이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에 두 번 갈 것 같지는 않은 캐스 피크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홍콩삼첨(香港三尖, 홍콩 3대 가파른Sharp 산) 여정을 마무리했다.
홍콩에 여행을 와서 가볍게 가기는 어려운 곳들이지만 홍콩에는 이런 모습도 있다. 여유롭게 여행을 온다면 가벼운 하이킹 코스를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