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프로젝트 50 #17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내가 읽은 김초엽 작가의 두 번째 책이자 첫 번째 단편집이다. 이 책을 읽고 김초엽 작가가 한국의 테드 창(Ted Chang)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초엽 작가는 최근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SF 장르 작가로 포항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생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화학자가 쓰는 SF소설이라 그런지 책 속의 설정이나 대화 등이 꽤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제목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이었다면 희망찬 미래, 무한한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를 할 것 같았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무언가를 내려놓고 포기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아닌가.
하지만 이 책 속에 담긴 소설들은 그렇지 않았다. 있을 법한 가까운 미래에서 생기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느낌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다름'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핍박당하는 세상이라도 사랑이 있다면 그 세상을 견뎌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펙트럼>을 읽고 나서는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에서는 <컨택트>로 번역된 영화 Arrival의 원작이자 사용하는 언어(소통방식)에 따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범위도 달라진다는 내용을 아주 멋있게 보여주는 그 소설 말이다. <스펙트럼>에서는 외계 행성으로 가게 된 희진이 색채로 역사를 기록하는 루이를 만나 가까워지는 모습을 그린다. <공생가설>은 우리가 왜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지를 아주 멋진 설정으로 풀어낸다.
소설집의 제목이자 동명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과학기술의 발전도 그리움, 외로움 그리고 잊혀짐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설의 주인공 안나는 우주여행에는 필수적인 냉동 수면과 관련된 연구를 하던 과학자였다. 그녀의 연구는 성공했고, 가족들이 먼저 떠나간 행성으로 곧 따라갈 예정이었지만, 우주에서 웜홀들이 발견되며 그녀가 가족들을 만나러 갈 기회를 놓치게 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감정의 물성>도 너무나도 있을 법한, 그러나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그려냈다. 감정을 물체화해서 판매한다니. 단지 행복, 사랑 같은 밝은 감정만 파는 것이 아니라 우울이나 분노같은 감정도 판매한다. 내가 내 방에 사두고 싶은 감정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최초의 동양인 중년 여성 우주인이 된 재경을 보고 우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가윤이 재경을 발자취를 따라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느 이야기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좋았다. 책을 펼치는 순간 놓을 수 없었고, 이 중 가까운 미래에 정말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상상했다. 과학 기술이 발전된 미래가 그저 차갑고 이성적이기만 한 곳이 아니라, 그곳도 늘 인간적인 따뜻함이 가득 한 곳이라는 점 또한 김초엽 작가 소설의 특징인 것 같다. 최근에 읽은 SF소설 중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