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May 12. 2022

전쟁일기

책 읽기 프로젝트 50 #18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전화번호가 적힌 한 아이의 팔이 연필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폭격을 피해 아파트 지하실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그림책 작가 올가 그레벤니크가 자기 딸아이의 팔을 그린 것이다. 올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엄마이자 아내, 딸, 화가, 그리고 작가이다. 또한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삶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이다.


올가는 삽화 작가이자 그림책 작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꿈과 계획들을 이야기했던, 평범하지만 오붓한 하루를 마치고 잠을 자던 중 폭격 소리에 깨어났다. 급히 중요한 짐들, 노트와 연필을 챙겼다. 그리고 아이들의 팔에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연락처를 적었다. 자기 팔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지하실에서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구상하던 다음 작품은 여우 가족의 동화책 대신 이 전쟁일기가 되었다. 지하실에서 9일을 보내는 동안,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다른 가족들을 남겨두고 우크라이나를 떠나야만 했던 때까지의 모습을 기록했다. 지하실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 그 속에서도 이어지는 삶을 모두 생생하고 거칠게.


작가는 우크라이나에서도 러시아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비슷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나치로부터 해방"을 시켜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도시를 파괴하고 가족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올가와 아이들이 폴란드에 도착했을 때, 폴란드에서 30년째 살고 있는 러시아 여자가 표 끊는 걸 도와줬다고 한다. 전쟁이 터진 이후 그 러시아 여자는 여러 친구로부터 외면당했다. 올가는 말한다. 이건 옳지 않다고, 이건 ‘민족'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올가는 아이들과 강아지를 데리고 우크라이나를 떠나 안전한 곳에 있다. 아직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와 남편은 여전히 하리코프(하르키우)에 남아있다. 그들의 전쟁은 우리에게서는 먼 이야기다. 처음에는 연일 뉴스에서 앞다투어 전쟁 소식을 전해왔지만, 이제는 점점 뜸해진다. 우크라이나에서도 출간되지 못한 이 책을 한국 출판사와 협업해 한국어로 먼저 출간했다. ‘먼 곳'에서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똑같은 지극히 작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부디 인지해달라는 정소은 옮긴이의 말이 마음 한 켠에 오래 남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