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사람들은 명절에 진심이다. 중국 전통의 명절도, 영국의 명절도 모두 챙긴다. 설과 크리스마스가 가장 대표적이지만 추석(中秋), 단오(龍舟節), 동지(冬至), 부활절(Easter)까지 모두 중요하다. 명절 전날에는 많은 회사에서 사람들이 일찍 퇴근할 수 있도록 배려해 3-4시에 이미 퇴근길 지하철이 북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길거리만 걸어 다녀도 지금이 무슨 시즌인지 알 수 있도록 아파트 로비에, 쇼핑몰에, 공원에, 오피스 건물에 때가 되면 그에 걸맞은 장식으로 바꿔 놓는다.
지금은 단연 춘절(春節, Spring Festival)의 기간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에 접어들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던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음력 설의 상징들이 대신 그 자리를 채운다.
복사꽃은 인연-연애운-과 재물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1월이 되고 음력설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에 그리고 쇼핑몰, 아파트나 오피스 로비 등에 복사꽃 나무나 복사꽃 가지를 쉽게 볼 수 있다. 복사꽃 나무에 붉은 "복福" 표시를 주렁주렁 달아 놓은 것들이 흔하다. 춘절 꽃시장에서도 복사꽃이 단연 인기라 큰 복사꽃 나뭇가지를 사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꽃시장에서 산 복사꽃으로 춘절 기간 2-3주 정도 집에 장식해 둔다.
홍콩 사람들이 이 기간에 복사꽃을 얼마나 많이 사는지 알 수 있는 정부 발표가 있다. "2023 복사꽃 분리수거 방안" 정도가 되겠다. 설 1주일 후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집에 두었던 복사꽃을 업사이클링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춘절이 끝나고 나면 얼마나 많은 복사꽃이 버려지는 것일까.
아마도 복사꽃보다 더 흔하게 보이는 것은 아마도 금귤나무일 것이다. 출근길 원통모양으로 잘 다듬어진 금귤나무가 보이면 설이 다가오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금귤의 금(金)은 황금, 돈을 뜻하고 귤(桔)은 순조로움을 뜻하는 길(吉)과 발음이 같다. 집이나 직장 문 앞에 놓아두면 행운이나 번영을 불러오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달린 노란 금귤은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실제로 먹으면 아주 시다고 하니 굳이 시도하지는 마시길.
2023년은 계묘년, 한국에서는 육십갑자까지 따져서 "계"는 흑색, "묘"는 토끼를 의미해 올해를 검은 토끼의 해라고 부른다. 홍콩에서는 십이간지에 조금 더 집중하는 듯하다. 거리 곳곳에 토끼 장식이 보이는데, 올해는 복사꽃으로 만든 토끼가 많이 보인다.
어릴 적 설날을 기다리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맛있는 명절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기다리던 것은 아마도 세배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들, 고모들께 세배를 하고서 받은 세뱃돈을 가지고 동생들과 슈퍼나 문구점에 가서 부자가 된 것 같은 마음으로 원하는 것을 골라잡던 그 시간.
중국에서는 빨간 봉투에 세뱃돈을 주는데, 이를 홍빠오(紅包, Red packet)이라고 부른다. 홍콩에서는 라이씨(利是 or 利事, Laisee)라고 부른다. 설 즈음이 되면 이런 라이씨 봉투를 파는 가게들도 생긴다. 김, 이, 박, 최같은 성이 새겨진 빨간 봉투를 파는데 디자인도, 크기도 다양하다.
중국에서도 지역마다 라이씨를 주는 방식이 다르다. 중국 본토에서는 주로 집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주고, 돈을 벌기 시작한 아이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한다. 홍콩에서는 결혼한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준다. 가족이 아닌 사이에도 라이씨를 주는 게 흔해서 사무실에서도 결혼한 직원들이 결혼하지 않은 직원들에게 준다. 아파트 관리원이나 단골 가게 직원들에게도 주는데, 그래서 라이씨에 담아주는 액수도 천차만별이다. 작은 것은 한화로 1500원 정도부터 가족들에게 주는 큰 액수의 라이씨까지. 봉투 크기로 그 차이를 표시하는 동료를 본 적이 있다.
라이씨에 얽힌 미신이 여럿 있는데 지역마다, 집안마다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음력 15일까지 라이씨 안에 돈을 꺼내지 않고 집에 보관했다가 그 이후에 꺼내기도 하고, 또 빈 봉투는 보관하지 않고 바로 버려야 한다는 속설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입춘첩을 쓰듯, 홍콩에서는 Fai Chun을 붙인다. 빨간 종이에 쿵헤이팟초이(恭喜發財), 출입평안(出入平安), 신춘대길(新春大吉) 등 신년에 주로 주고받는 인사말들을 적어 문 양쪽으로 붙여놓은 것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설 즈음이면 이런 글을 함께 적는 행사 같은 것들도 있고, 길거리에서 멋진 글씨체로 이런 것들을 적어서 파는 이들도 종종 볼 수 있다.
홍콩에서는 설이 지나야 정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 같다. 설이 지나고 정월대보름이 되면 사자탈을 쓴 사람들이 춤을 추며 행운과 번영을 비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피스에서 새해를 축하하는 연회(Spring dinner)를 주최하기도 하고 말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그리고 성공적인 한 해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