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자율장학 수업 공개자로 뽑혔다. 분명 자율 장학인데, 난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회의 자료를 보니 내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근무하던 학교에서 총 3명의 수업 공개자가 있었는데 수업 공개자로 선정되었단 사실을 안 것은 수업 공개 일주일 전이었다. 준비할 시간이 많이 없었다. 더군다나 토요일은 운동회, 일요일 하루 준비하고, 월요일이 수업 공개일이었다.
"일요일에 세 사람은 모두 나와서 수업 준비하고, 토요일 운동회도 적극적으로 준비하세요."
수업 공개 3일 전. 금요일.
운동장에 나가 만국기를 달고, 필요한 물품들을 꺼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수업 준비할 시간이 따로 없었다. 늘 하던 대로 초과근무를 하며 밤 9시가 되어서야 학교 문을 잠그고 마지막으로 나왔다.
초등교사면 알 것이다. 운동회라는 단어만 들어도, 어떤 업무가 있고,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임을. 요즘엔 전문 업체를 통해 하는 학교도 늘어났지만, 예전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운동회의 꽃이라 여기는 부채춤, 학년별 무용, 경기, 학부모 경기, 입장, 퇴장 순서, 대형 맞추기, 합주부, 풍물부 등의 공연이 모두 교사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교사가 되고서야 알았다.
그 운동회 다음 날 쉬고 싶었다. 하지만 교감은 9시까지 학교로 나와 수업 준비를 하라고 강제 초과근무시간을 배정하였다. 그렇게 나를 포함한 3명의 선생님들은 운동회의 피로가 채 풀리지도 않은 채 장학 수업 준비를 했다.
드디어 지구별 장학 수업일. 떨렸지만 심호흡을 깊게 하고 차분히 수업을 진행했다. 끝나고 교실을 가득 에워싸던 장학사, 선생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끝냈다.'
지구별 장학에 학부모도 초대되었던 것인지도 몰랐는데, 수업을 참관했던 우리 반 학부모 한 분이,
"선생님, 아까 협의회에서 장학사님들이 선생님보고 천상 선생님이라고 칭찬을 엄청 많이 하셨어요. 제가 우리 선생님이라고 자랑했어요. "
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데, 수업자들을 제외하고 수업 후 협의회를 가졌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5년 차 시절, 그저 난 잘 끝났나 보다 생각했다.
학교 방문자들이 떠나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 인터폰이 울렸다.
"네, 0학년 0반입니다."
"야, 일로 와봐. 빨리. 나 교감이야."
"네...? 교감선생님, 어디로 가면 될까요?
"어디긴 어디냐? 교무실이지."
"아.. 네.. 근데 애들 지금 수업 중인데."
"(뚝)........."
아이들에게 좀 급한 일이 있어 다녀올 동안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점들을 간단히 언급해 주고 교무실로 왔는데 수업 공개자 두 분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신호를 주고받으며 앉았다. 나를 "야"로 부르신 그분은 교수학습과정안들을 테이블에 던져 놓으며 말씀하셨다.
"나 솔직히 오늘 수업들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습니다. "
그분의 말에 따르면, 발표하기 위해 아이들을 손을 들 때 쭈욱 펼치지 않았다는 점, 발표를 할 때 오른쪽에 앉은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왼쪽 아이들은 왼쪽으로 온전히 일어서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발표를 해야 하는데 의자를 들여놓는 아이, 의자를 들여놓지 않고 발표를 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게 문제라고 하셨다. 책상에는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만 올려져 있어야 하는데, 필통이 책상 위로 올라온 아이들도 있었다고 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돌이켜보면, 교수학습과정이나 방법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아이들의 생활지도와 관련한 내용들이었다. 19년 차 교사가 보았을 때 그림같이 아이들이 손을 들고, 바른 자세로 서서 말하는 것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그러한 태도를 가질 수 있기에 좋은 태도다. 필요한 필기구만 꺼내는 것은 아이들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은 상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녀의 기준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며, 운동회를 끝내고 쉬지도 못하고 다음 날 밤늦게까지 컵라면을 먹으며 수업 준비를 한 사람들의 노력은 헤아리지 못했다. 설사 그녀의 기준에 엉망징창 수업이었을지라도 첫 한 마디는 "고생했다."로 시작했으면 덜 차가웠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수업에 대해 진심이었다면, 수업 중인 교사를 불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는 않았을 테지. 우리 셋은 모두 그녀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을 우리에게 쏟아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이후로도 그분은 툭하면 수업 중에 찾아와 아이들이 다 보고 있는데 가구 배치를 옮긴다던지, 게시판에 게시해 놓은 아이들의 작품을 떼어 놓는다는 행동을 했다. 추측건대 그분은 그것이 후배 교사들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기준에 맞춰지지 않는 후배 교사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껴 "야!"로 부르며 격의 없이 대하려고 했을 지도.
분명한 것은 그분은 멸시가 내면화되어 있었고,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교육 현장을 모욕했다.
새내기 교사이든 30년이 된 교사이든, 우리는 각자의 교육 철학과 그 현장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그분의 감정과 기준을 두려워하고 맞추느라, 정작 나의 감정을 돌보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같은 교육 철학과 교수학습방법이 통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완벽한 교육, 완벽한 삶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아마도, 그분의 교육 현장도 아마도 완벽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분도, 나도 무결점의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특히 초보 교사들에게는 더욱이 실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아니, 어쩌면 실수의 의무가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실수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지하고, 노력하고, 성장하는 그 과정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고민과 위기의 순간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나와 어울리는 교육현장, 스스로를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는 교육 현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아이들이 보고, 후배 교사들이 보며 모델링할 수 있다.
결점을 들추어내는데 혈안이 될 필요도 없고, 결점을 감추는 데 애쓸 필요도 없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제대로 된 평가를 해 주는 것은 나 자신이다.
'왜 나는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릴까?'
이런 생각이 든다면, 나는 너무 높은 평가 기준을 갖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선 <보통의 교사>가 되려는데 목표를 가지자. 분명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기본생활교육을 충실히 하는 교사. 아이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교사. 그런 보통의 교사가 되려고 해 보자.
어떤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고 싶은지, 어떻게 학급을 경영할 때 행복한 지 스스로 알아야 이 현장에서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가 당신을 함부로 "야"로 부르며 평가질을 할 때에도,
그건 당신의 생각이고, 당신의 가치라고 여유 있게 받아칠 수 있다.
내 안에 확고한 교육 철학과 학급 경영방식이 있다면.
그렇게 나는 1년 만에 다른 학교로 옮겼다. 인격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한쪽 폐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손가락이 퉁퉁 붓는 등 이유를 알 수 없는 몸에 이상 증상들이 생겼다. 그 와중에도 좋은 제의가 들어왔었지만,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1년 즈음 지나고, 나는 그분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러 갔다.
"아이고, 잘 왔네. 잘 왔어. 정말 착하다. 잘 왔네."
됐다. 그녀가 나를 위해 웃어줬다.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해서 그분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미워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 자리에서 나는 경험했다.
"야! 맞아. 이렇게 찾아올 땐 이렇게 뭐든 사 오는 거야. "
그녀에겐 여전히 나는 "야"였다.
미워했을 때에 불리던 "야"와 느낌이 다른 호칭.
따스한 "야".
@지혜롭게, 몌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