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만큼의 시간의 사치를 부려야 하는 것일까? 25년이 시작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24년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부서질 것 같은 시간들을 버텨냈지만 차디찬 겨울이라 상처의 시간들은 쉽게 아물지는 못했다. 나의 부서진 시간들을 견고하게 다듬고 보듬어 줄 필요가 있었다. 근데 무엇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야 하지?라는 의문과 함께 수많은 질문들이 불현듯 찾아왔다.
‘왜 너는 조금이라도 쉴 틈이 있으면 너 자신과 있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를, 또는 다른 무언가를 찾는 거니?’
‘왜 너는 자꾸 자신과의 데이트 약속을 어기는 거야? 너에게 너 자신은 항상 후순위로 빠져야 되는 거야?’
‘뭘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우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비워둬. 공간이 생겨야 뭘 하고 싶은지를 알지.’
쌓여버린 질문들 앞에서 나는 마술에 걸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정지된 일상들 속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도 내려놓았다. 글을 쓰는 것조차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니 다행히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책방, 떡볶이, 쉼’
떡볶이라니. 책방과 쉼이라니.
매일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정말로 나는 그것들을 간절히 원했다. 그래도 나름 세 가지를 바라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그걸 나는 ‘방황여행’이라고 일컫기로 했다.
<방황여행의 첫 번째 테마. 최인아 책방 여행>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고 나는 문득 책방에 가고 싶단 생각을 실행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게 주어진 3시간. 버스를 잘못 타서 이상한 곳에 내렸을 때 무슨 책방이냐며 자책하며 가지 말 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오늘이 아니면 못 갈 것 같은 생각, 그리고 휴남동 서점을 처음 열었을 때의 영주의 공허함이 서점 안에서 건강함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며 어쩌면 책방에 가면 그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인아 책방에 들어서니 고요함과 적막함이 가득하다. 최인아 씨를 만나진 못했지만, 계단에 걸쳐 앉아 책을 읽던 여자도, 커피 머신 앞 의자에 앉아 나를 지켜보던 아저씨의 손에 들린 책이 데미안이었다는 것도 특별했다. 주제별로 큐레이션 된 책들을 바라보며 보물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삶에 대한 질문이 불현듯 나올 때 아마도 나는 이 책방에 와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차분한 책 공기와 함께 차 한잔을 홀짝였다.
<방황여행 두 번째 테마. 떡볶이 여행>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이 떡볶이라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떡볶이가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대단한 음식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소울푸드 같은 거라 체인점 떡볶이가 아닌 가게의 특성이 있는 특별한 떡볶이가 먹고 싶었다. 빨갛고 녹진한 양념이 베어든 떡볶이를 찾아온 곳. 한 입 먹자마자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희열을 느꼈다. 이게 뭐라고, 나는 이걸 찾아오지 못했던 것일까.
빨간 양념에 묻어진 그 떡볶이 한 입에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떡볶이들의 기분 좋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빨갛고 매운 기억들이 부서진 시간들을 채우고 있었다.
<방황여행 세 번째 테마. 쉼>
꽁꽁 얼어있는 호수, 잎이 다 떨어진 나무에게는 겨울은 버리는 시간일까? 차가움과 적막함만 남아있어 사람조차 없는 공원은 겨울에 쓸모가 없는 것일까? 차가운 시간도,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도, 내 인생의 시간임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긴다. 청춘의 거뜬한 체력이 고갈되어 가고, 빛나는 미소를 잃어도. 잃은 자리를 채우며 비로소 얻게 될 것들. 그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해 본다. 겨울에 한 살 더 먹어서 다행이다. 자연과 함께 떨구고 비워내며 나만 쓸쓸히 빈 공간으로 가득한 게 아니라. 자연 너도 그러해서. 찬란한 시작을 알리는 봄을 기다리듯, 나의 시간도 꽃을 피우겠지. 이 나이에 이르러서 가능해지는 앎과 그 무언가가 생기겠지.
방황 여행은 나하고 있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지, 귀중하게 여겨야지 라는 마음을 주었다. 그리고 상처받고 부서진 시간들은 찬란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나의 겨울의 시간이라는 마음도.
@지혜롭게, 몌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