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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AI 밥그릇 08화

성공하는 공부법은 따로 있다.

by 맨디

다들 선호하는 공부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내 경우는 처음 이론 공부를 가능한 짧게 끝내고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교과서는 비교적 평평한 느낌이다. 높낮이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 원하는 걸 찾아내기가 어렵다. 모두 중요해 보이기도 하고, 모두 다 별거 없이 당연한 소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풀이는 다르다.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데, 잘 헷갈려하는 것들을 꼬집는다. 그래서 문제를 먼저 풀고, 풀다 처음 듣는 개념이 나오면 다시 교과서로 돌아간다. 높낮이 없는 교과서에 틀린 부분에 대해 줄을 그어두고, 노트를 해두면 비로소 작은 언덕이 생겨난다.


그 언덕 위에 올라서야, 조금 과목을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상하게, 남편이 그 높이에 서 있었다.

딱 그 정도 높이에서 내게 말했다.

"우리 브리즈번에 가야 할 것 같아."




돌이켜 보면, 시작은 남편도 비슷했다. 나와 비슷하게 AI 툴들을 이것저것 켜놓고 커리어를 상담했다. 자세한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공유하지는 않았었다. 다만, 매일 밤 우리의 조용한 방은 키보드 소리로 요란했고, 이따금 쓸모 있는 생각을 나눴다.


1.

남편이 처음 한 일을 여섯 시간짜리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제목은 'AI for everyone'이었다. AI의 입문서 격이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거 결제해도 될까? 수업을 그냥 끝까지 들을 수는 있는데, 시험을 보고 수료증을 받으려면 결제를 해야 한데."

"수료증 받아서 뭐 하게?"

"링크드인에 이거 들었다고 올릴 거야"

"... 뭐 그래라"

고작 6시간짜리 강의 하나 들었다고 포스팅을 한다고?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자격증 공부를 안 해본 티가 난다고 생각했다. 고작 그 정도 노력을 밖으로 꺼내놓다니. 어쩌면 아주 오래된 내 고질적인 열등감이 새어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누가 봐도 분명히 자랑스러운 게 아니면 밖으로 내어놓기가 좀 망설여진다.


며칠 뒤, 남편은 그 수료증을 링크드인에 광고했다.


2.

다음으로는 당분간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밋업(Meetup)에 가겠다고 했다. 또 그러라고 했다. 아이는 내가 먹이고 놀다 재우겠노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도 몇 가지 AI관련 밋업을 추천해 줬지만, 난 이내 관뒀다. 몇 번 가봤지만, 이미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Nextchat(사내용 챗GPT)을 홍보하는 수준이었다. 실망스러웠다.


남편의 반응도 비슷했다. 실망스러웠단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씩 쓸모 있다고 생각된다며 한 두 조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주워온 한 두 조각을 쌓아두고, 그 걸 기초로 또 몇 가지 강의를 들었다.


3.

그즈음부터 그는 AI를 이용해 링크드인에 포스트를 시작했다. 여러 기사들 중에 AI와 직업에 관한 의미 있는 몇 가지를 AI가 가져오면, 그가 골랐다. 그러면 다시 AI는 포스트를 작성했다. 결정된 내용들이 그의 링크드인에 차례차례 쌓였다.


4.

그리고 동시에 회사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매니저에게 가 끊임없이 AI를 위한 프로젝트들을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매니저 에반은 나도 잘 알고 있는 그의 오랜 동료였다. 그래서 옆에서 곁눈질로 지켜보며,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AI는커녕 IT 툴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아주 싫어하는 에반에게 끝도 없이 가서 AI에 대해 말하고 또 말했다. 집에서 일하는 날, 오며 가며 들은 미팅에서 에반은 그를 귀찮아하고 또 귀찮아했다.


어느 날 그는 같은 그룹 내 다른 회사 대표와 10분간 미팅을 잡았다고 들떴다. 도무지 말을 들어주지 않는 매니저를 포기했다. 대신, 좀 더 그가 생각하는 테크 분야와 닿아있는 회사의 대표에게 연락했단다. (물론 매니저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어렵게 시간을 얻었다고.

회사 CEO에게 무려 하지만 동시에 고작 10분을 할애받은 것이다. 영화 속 10분처럼 몇 달간의 고민을 쏟아내야만 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남편의 아이디어를 높게 산 대표는 다음에 있던 미팅도 취소하고, 남편과 1시간 동안 이야기 했다고 했다. 프로젝트를 구체화하자는 확답도 받았다. 일들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대표는 남편을 다른 CEO들과의 조찬에도 초대했다.

남편이 아침에 그렇게 일찍 일어나 출근하는 걸 처음으로 봤다. 결혼식 때보다 훨씬 단정한 정장차림으로 집을 나서는 걸 난 침대에서 배웅했다.


그리고 바로 그 조찬에서 또 다른 초청을 받아왔다. 이번엔 스케일이 달랐다. 브리즈번에서 3일간 열리는 포럼에 AI와 관련해 패널리스트로 초대받았다고 했다. 단순한 출장이 아니었다. 숙박비나 비행기값 정도가 아니라, 나도 엔지니어라는 말을 듣고 내 초대권도 보내왔다. 3일 연속 초대권만 백오십만 원 상당이었다.


연말에는, 호주 CEO들을 대상으로 하는 AI관련 행사도 주체한다고 했다.

정말이지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마침 그때쯤 난, 첫 Power BI 시험에서 똑 떨어졌다. 시험에 떨어졌다는 자체만으로도 부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남편은 어느새 조오기 언덕 위에 서서 날 내려보는 느낌이었다.


나도 방향 자체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AI시대로 넘어갈 때, 기술을 기반으로 한 엔지니어가 아주 조금은 더 생명줄이 길 거란 확신이었다. 최신 툴들을 익히며 AI들이 어떻게 프로젝트의 이모저모를 배워가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발을 옮겨 딛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난 교과서를 아주 처음부터 꼼꼼히 읽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도 서론만 읽은 기분이었다. AI와 관련된 본분은 아직 목차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아. 내가 다시 정석에 집합만 파는 바보짓을 하고 있었구나'


그 사이 남편은 사람들을 만나 연습문제를 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자주 틀리는 부분이나 중요한 핵심에 형광펜을 칠해두고 있었다.


나만 이내 지쳐 풀썩 책장을 덮었다. 한숨 쉬듯 책 위로 쓰러져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세워둔 교과서 앞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연결.’

그 단어 옆에는 빨간 별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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