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코로나19로 락다운이 되고 10개월 24시간 세 식구가 붙어 지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제 좀 살만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암환자가 되었고 우리의 일상은 박탈되어 엘라파는 서울 집에, 엘라는 외갓집, 나는 요양병원과 본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붙어 지내던 엘라와 한 달에 한두 번 보는 사이. 통화라도 자주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엄마랑 통화하면 엄마가 더 보고 싶어 져서
영통을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할머니에게 고백했기 때문에.
항암 4차 4일째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데, 딸에게 전화가 온다.
“엄마, 크리스마스에 정말 오는 거야? 엄마가 온다는 소식에 내가 선물을 준비하고 있어.”
크리스마스에 엄마가 온다는 소식에 너무 기뻐서 확인하려고 전화를 했고, 3주 전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고 있단다.
항암 중이어도 걸을 수만 있다면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오늘도 어김없이 산책을 나간다. 항암 부작용으로 눈썹이 빠져서 그런가 슬프지 않아도 (마스크에 습기가 차면서) 눈물이 난다. 눈은 파르르 떨리고 시력까지 감퇴되어 잘 보이지 않지만 매일 오고 가던 길이라 감으로 걷는다. 말초신경은 죽은 채 팔다리만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이 딱 ‘좀비’ 같다.
그렇게 보낸 하루였는데, 엄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딸의 따뜻한 말은 비어있는 나의 말초 공간을 환희로 채워주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니까 딸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항암치료로 컨디션이 바닥을 쳤을 때 딸이 해 준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주기를 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우리 택이는 (돌아가신) 엄마가 언제 제일 보고 싶데?"라고 묻는 이웃 아저씨(성동일)의 질문에 택(박보검)이가 하는 대답은 이랬다.
매일요. 엄마는 매일매일.... 보고 싶어요."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엘라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책을 찾았다고 했다. 책 읽는 척하면 눈물 나는 순간을 감출 수 있어서. 혹은 잠들어 있는 베개가 눈물로 흠뻑 적셔져 있던 날도 많았다고 했다.
할머니, 저는 밤이 싫어요.
밤만 되면 엄마가 그렇게 더 보고 싶어요.
아이를 버리는 엄마는 있지만 엄마를 버리는 아이는 없다. 온 우주의 힘을 다 빌어 따뜻한 말과 마음을 주는 건 엄마가 아닌 딸이었다. ‘딸이 세상에 태어나 나에게 온 건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였구나.’
암 환자가 되고서야 아이의 절대적인 사랑을 깨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