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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이프 너머, '사각사각'에 대한 예찬

[8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by 마이 엘리뷰

"어머, 뒤집었어! 뒤집었어!!"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나는 동안 부모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순간은 참 많다. 나의 친정 엄마는 39년 전 여름날, 잠깐 부엌에 다녀온 사이에 뒹굴뒹굴 누워 놀던 100일 남짓의 내가 돌연 안방에 엎드려 있어 경이로웠다고 전한다. 아기 뒤집기의 순간은 그런 무수한 놀라움 중 대표적인 한 가지. 아기가 "어... 엄... 마" 하고 입을 떼는 순간과 돌을 지나 간신히 걸음마를 내딛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꼭 지금 아이를 키우지 않는 대도 나의 어린 시절 그 어떤 몸짓에 엄마 아빠가 '허허허' 웃었다거나 토끼눈이 되어 사랑 가득한 표정을 연신 지었을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인생 처음으로 보이는 그 어떤 행동은 신기하고 기특하고 때론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 무엇이다.


아, 모든 게 '감동'의 영역이면 너무나 좋겠는데, 실은 그 놀라운 모먼트들 중 '아차차' 싶은 행동도 있다. 이를테면 이제 막 세 돌을 넘긴 아이가 스마트폰 스크린을 아래위로 쓰윽 넘기는 스와이프 (Swipe) 유창성 같은 것.


* 스와이프 (Swipe) : 디지털 기기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기는' 몸짓을 표현할 때 Swipe 라는 영어단어를 사용한다. 주로 초단위 숏폼을 볼 때 화면을 아래위로 조작하며 넘기는 것, 다양한 카드뉴스 형식의 콘텐츠를 볼 때 화면을 쓸어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스마트폰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달라도 참 다르다. 익숙하고 능숙해질 게 따로 있지, 스와이프(Swipe) 유창성을 운운하게 될 일이라니.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흔히 접하는 소근육이나 대근육, 언어와 인지 발달 영역과 별도로 디지털의 이해발달 영역이라도 하나 만들어둬야 하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일련의 기기들과 참 친하다. 유독 발화가 느렸던 신경다양성의 첫째 아이도 뒤늦게 터진 발화 목록 안에 '아이패드'와 '아이폰'과 같은 고유명사가 끼어들어있었다. 사과나 바나나 같은 기초 일상 어휘를 내뱉는 것만큼이나 "아이패드 주세요", "아이폰 할래요"를 기어코 발음해 냈다. 말이 느린 아이가 문장을 만들어 소통하는 건 기특하다만, 그 부류가 너무나 디지털 세대다워서 뒤돌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도리질 한 건 안 비밀. "아흑, 진짜 요즘 애들... 어째." 요즘 애들 대명사 MZ 세대 끝자락 엄마인 내가 요즘 애들을 언급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요즘 애들 진짜 어떡해. 이 꼬맹이 손 놀림 좀 보라고.


'터치 터치'도 아니고
위아래로 '쓰윽 쓱' 쓸어 넘기더라고
세 살인데
열세 살 쯤은 돼보였다니까


뜻하지 않게 딸아이의 스와이프 능력을 관찰해 버린 나는 며칠간 그 가녀리고 신속했던 손짓을 자꾸만 떠올렸다. 핸드폰 없이는 웬만한 일상 살이가 안 되는 요즘 날들이니까,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핸드폰에 소위 '환장'하는 건 끄덕일 만하다. '아이들 앞에서 핸드폰 되도록 안 써야지'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담임선생님이랑 소통하는 창구는 키즈노트 앱이요, 너희들 우유 재깍재깍 주문 넣는 건 쿠팡 앱이요, 아침에 사과 깎아 먹이려고 새벽배송시키는 건 컬리 앱이니, 뒷주머니에 꾸역꾸역 폰을 숨겼다가도 자꾸만 오른손이 가닿는 걸 어떡하겠나. 하루만 핸드폰을 두고 나가기로 했다 (1화 참고)고 결심했을지라도, 그 단단한 마음이 영구적일 수는 없었다. 디지털 '간헐적 단식'이 필요해 (4화 참고) 부르짖어도 결국 필요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꺼내들 수밖에 없는 게 현실. 그러니까 '간헐적'이라는 수식어를 꼭 끼워넣기도 했고.




그럼에도 '터치터치'도 아니고, '쓰윽쓱' 오른손 검지로 스와이프 해대는 건 너무하지 않나. 만지작 거릴 수도 있고, 이것저것 신기해서 눌러볼 수도 있다는 건 얼추 인정! 인생 3회 차인 것처럼 만 3세 아이가 노련하게 화면을 전환하는 건 단순히 손가락 소근육 발달이 '놀랍다'라고 해두기에는 생경한 맛이 있었다. 놀라웠지만 동시에 민망함도 앞섰다. 내가 그토록 '넘기고 넘기는' 손짓을 많이 보여줬던가. 아이 곁에서 가장 거리가 가까운 사람은 엄마일진대, 애써 숨기려고 했던 모습을 그림자처럼 찰떡 담아간 것 같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걱정과 황당, 어이없음과 민망함이 한 데 뭉쳐져 남편에게 괜한 분풀이를 한다. "아니, 터치터치도 아니고 위아래로 쓰윽 쓱 쓸어 넘기더라고. 세 살인데 열세 살 쯤은 돼보였다니까!"


물론 아이의 스와이프 역량의 탓을 엄마 아빠에게만 돌릴 수는 없겠다(... 고 변명해 본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모든 어른들이 화면에 두 눈을 두고 두 번째 손가락 곧게 펴서 스와이프 하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부모만 단절 의지를 갖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테니까. 차를 타고 밖을 내다봐도, 식당에 앉아도, 키즈카페에 몰려가도, 스마트폰은 누군가의 손과 발이 된 것처럼 당연히 함께 하는 풍경들이다. 부모만 핸드폰을 단절한다고 아이들이 '디지털 기기 따위' 영영 안 볼 수 없는 세상 아닌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이런 손짓을 자주 보니, 아이들은 너무 익숙하고 친근하며 결국 따라서 몰입할 수밖에. 열여섯 살이 되어서나 첫 핸드폰을 거머쥐고, 스물네 살이 되어서나 실시간 인터넷이 가능한 스마트폰의 맛을 보게 된 나의 세대와는 완벽하게 '판'이 다른 세계인 것. 구태여 '라떼' 얘기를 꺼내자면, "얘들아, 나 때는 그렇게 검지손가락을 쓸어 넘길 게 없었어. 엄마 때는 말이야, 실물 키보드 꾹꾹 누르는 진짜 폰으로 시작했단 말이야"




사각사각. 딸아이의 남다른 쓰윽쓱 몸짓을 보면서 돌연 떠올린 키워드. 20대 초반부터 즐겨 쓰던 수식어 1순위이기도 했다. 당시 사이좋은 세상의 대문 소개 문구에도 '사각사각'을 넣었고, 끼적이던 에세이 문장에도 흔히 등장시키던 나의 최애 어휘 중 하나. 글씨 꾹꾹 눌러쓰기 딱 좋은 2B연필로 다이어리 한 페이지를 단정하게 써 내려가는 느낌에도 '사각사각'을 얹었고, 서점에서 새로 산 책의 빳빳한 종이 질감을 넘기는 느낌에도 '사각사각'을 덧대어 쓰곤 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벼, 보리, 밀 따위를 잇따라 가볍게 벨 때 나는 소리'라고 되어 있는데 내겐 때때로 '쓰고 또 읽는' 아날로그적인 몸짓을 표현하고 싶을 때도 자유롭게 갖다 쓰던 의성어였다. '연한 과자나 배, 사과 따위를 가볍게 씹을 때 나는 소리'가 고요한 가운데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도 닮았고 글자를 끼적일 때 내뿜는 미세한 소리와도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난 늘 뭔가 빡빡하고 피곤한 일상에 지치면 이 '사각사각'이라는 단어로 묘사할 수 있는 행위를 했다. 그게 내 고도의 스트레스 레벨을 낮추는 유일한 힐링법이었다.



'쓰윽쓱' 화면을 밀어 올리는 몸짓, 스와이프 하는 손짓이 대세가 된 세상에서 '사각사각'의 기운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사각사각' 의성어의 힘에 기대어 살아왔던 나는 아직 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아들과 딸이 디지털 세대스러운 몸짓을 보일 때마다 흐업 놀라곤 한다. 때때로 보는 유튜브 영상 채널을 스스로 어찌나 그리 빨리 터치해 검색할 수 있는지 신속함에 놀라고, 잠깐 보다가 마뜩지 아니하면 이내 과감히 '넘김 넘김'하는 결단력에 놀라버린다.


'사각사각' 책장을 넘기고, 글자를 적던 소리 안에는 '잠시 멈춤'이라는 게 있다고 믿었다. 한 줄 한 줄 담아두며 읽고 싶어서, 글자를 또박또박 생각하며 쓰고 싶어서 천천히 나아가는 태도가 들어있다고 생각했다. 사전상의 원뜻도 곡류를 벨 때, 연한 과자를 씹을 때 나는 소리라고 하질 않던가.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훅훅 넘겨버리는, 쓰윽쓱 지나버리는 영상들 속에서 아이의 손짓은 너무 빨랐고 '천천히 하나하나 보자'고 끼어들 틈조차 없었다. 아이에게 '사각사각'의 매력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건 이쯤이었다.




의태어와 의성어 사이, 그 간격을 메우고픈 마음. 이미 '쓰윽쓱', '휙휙' 하는 손짓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과 '사각사각'의 매력을 함께 알아가려면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아기 시절부터 디지털 기기를 너무나 충분히 접하는 시절, 갑분 아날로그적인 태도와 느낌, 분위기를 알려주고자 한다면 애들이 그저 '촌스럽다'고 돌아보지도 않을까 봐 돌연 겁나는 요즘 되시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스와이프' 하는 손짓에 스스로 더 길들여지기 전에 부지런히 아날로그 몸짓과 시선, ASMR 방불케 하는 청각적 미학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세 돌 넘은 아이가 열세 살, 아니 서른 살 못지않게 노련한 손놀림을 보인다면, 그건 화면을 쉴 새 없이 넘기는 '스와이프가' 아니라, '사각사각'의 미덕이었으면 좋겠다. 서툴게 글자를 적어 내려 갈 때 벼, 보리, 밀 따위를 가벼이 베는 만큼의 경쾌한 사각거림이 있고, 마음이 온통 지친 날 책장을 넘길 때 연한 과자를 씹는 것만큼이나 은은하고 잔잔한 통쾌함이 있는 의성어. 스마트폰 화면과 맞닿은 당연한 몸짓에 어떻게든 아날로그적인 요소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


아, 그러니 잠깐! 이글이 여기에서 끝났다고 당장 휙, 쓰윽쓱 화면을 밀어 다른 연재글로 옮겨가시기 전에 아주 잠깐만 멈춰주셨으면 좋겠다. 갑자기 내 글을 '사각사각' 필사해 보라느니, 당장 폰을 거꾸로 뒤엎어두고 '사각사각' 책장을 펴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바삐 움직일 당신의 손가락이 잠깐만 쉬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세 돌 넘긴 아기가 '스와이프' 하는 세상에서 소수의 누군가만이라도 잠시만 '넘김'의 손짓을 멈추고 딱 10초만 우리가 디지털과 맞닿은 몸짓을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매끈한 화면을 쉴새 없이 문지르는 우리의 손길에 잠깐만 '멈춤'하는 순간이 있기를. '사각사각' 의성어처럼, 각자 나름의 아날로그적 감각요소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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