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디지털 OFF, 모두를 위한 자연 놀이 레시피
초등학교 시절부터 붙은 별명 중 하나가 '문방구 아줌마'였다. 곁에 있던 친구가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해도 바로바로 꺼낼 줄 수 있었기 때문. 풀, 가위 정도면 흔히 들고 다니는 소지품이라고 하겠는데, 설마설마했던 색깔별 클립도 가지고 다니고, 스테이플러도 심 크기별로 챙겨 다녔다. '에이, 이건 없겠지?' 묻는 친구들의 질문에 나는 진짜 문방구 주인마냥 척척 꺼내주곤 했다. 열 살 남짓의 시절이었는데 뭐 그리 일상 필수템이 많았을까 싶지만, 혹시나 필요할까 싶은 물건들은 꼭 챙겨다니자는 주의였다. 맥시멀리스트의 시작, 바리바리 싸가지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니 임신부가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녀요
도대체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거워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반년 뒤면 찐 마흔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비슷한 결로 살아가고 있다. 몇 해 전 둘째를 출산하던 달, 출산 앞두고 마지막 진료를 갔다가 간호부장님한테 어김없이 잔소리를 들었다. "아니 임신부가 이렇게 무거운 걸 들고 다녀요?" 네네, 한두 번 들어온 소리가 아니라서 '헤헤' 웃어넘겼는데, '도대체 가방에 뭐가 들었길래 이러냐'는 질문에는 나도 물음표가 동동 떠올랐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자칭 타칭 맥시멀리스트의 짐 싸기는 이러하다. 갑자기 시간이 뜨면 공허하게 흘려보내기 싫으니 에세이 한 권을 일단 가장 안 쪽에 챙겨 넣는다. 기분에 따라 에세이가 아니라 실용서적이 읽고 싶을 수도 있는 거니까 요즘 트렌드 알려주는 경영서적도 옆에 끼워 넣는다. 일단 책 두 권만 넣어도 꽤나 무게감이 생긴다. 수분 보충해야 하니까 500ml 생수 한 병 챙기고, 하루를 지내다가 배고플 때 허겁지겁 아무 인스턴트 음식으로 배를 채우기 싫으니 간단한 견과류와 콩두유도 챙겨 넣는 것도 필수.
아, 커피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데 텀블러 사용하기 실천하면서부터 또 안정감 있게 가방 안에 기둥을 세운다. 카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에 대비해 노이즈캔슬링 잘 되는 나의 블루투스 이어폰도 잊지 않고 챙겨 넣고 손세정 티슈며 물티슈며 위생용품 잘 들어가 있나 들여다보고, 이런저런 책 보다가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남겨야 하니까 맥북도 고민하다가 넣는다. 실은 이게 다는 아니고, 더 있는데... 말이지요.
출산 막달까지 역대급 보부상이었던 일인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될까. 무엇을 상상하든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큼직함', 그 이상일 거라 짐작해 본다. 육아맘 가방 싸기 대회하면 아마 크기로는 내가 일인자 찍고도 남지 않을까. 남들은 기저귀 가방 오밀조밀 간단하게 잘도 챙기던데 문화센터에 갈 때마다 빅백을 최대한 뚱뚱하게 불려 다니는 내 모습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고3 때 언어영역 문제집도 챙기고, 수리영역 8절 모의고사집도 쑤셔 넣고, 언어와 수리만 하다가 사탐 영역이 아쉬울까 봐 결국 전 과목 참고서를 이고 지고 다녔던 시절이랑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아이랑 외출하면 안 그래도 변수가 역대급이지 않은가. 이유식을 떼고 배변훈련이 끝난 후로는 챙길 게 줄었음에도 '이것도 필요할까 봐, 저것도 필요할까 봐' 미리미리 준비하는 파워 J 엄마 여기요.
얘들아 오늘 키즈카페 갈래?
자연 놀이터 갈래?
온몸으로 자연과 맞닿는 경험 하라고
최대한의 것들을 챙기는 마음
이전 글에서 밝힌 바 있는 딸의 '스와이프' 능숙도에 놀란 뒤로 (8화 참고. 스와이프 너머 '사각사각'에 대한 예찬) 자주 외출 노선을 택하는 엄마의 단골 질문을 바로 이것. "얘들아 오늘 키즈카페 갈래? 자연 놀이터 갈래?" 아이들의 시선이 그나마 디지털 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나갈 때'이기 때문. 놀이터는 따로 비용이 들 일이 없음에도 엄마가 추구하는 쾌적함 측면만 이기적으로 따져 묻자면 은근히 '키즈카페'에 가겠다는 대답을 기다리게 된다.
오묘하게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너희 남매는 대답만 하세요) 우기고 싶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내 마음 같질 않아서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음에도 언제나 '자연 놀이터'를 가겠단다. 마치 엄마 입에서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고 제안한 게 인생 최대의 행운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아이고야, 그래 너네들 가고 싶은 데 다 가자!" 어딜 나가든, 집에서 핸드폰 문지르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 두면서 마지못해 신발에 발을 구겨 넣는다.
자연으로 가는 길에는 의외로 제법 준비물이 필요하다. 키즈카페는 아이당 2만 원 남짓의 입장료를 계산해 두고 주머니가 털려도 멘탈은 털리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정도만 단단히 챙겨가면 되는데 맨 몸으로 부딪치면 되는 줄 알았던 자연, 제대로 즐기려면 그 옛날의 문방구 주인 본능을 깨우는 게 필요했다. 도심에서 최근 쏙쏙 생겨나는 모래 놀이터에 방문해서 온갖 흥 다 끌어올려 놀려면 모래놀이 도구쯤은 필수. 그 어떤 선택지를 끼워 넣더라도 '자연 놀이터' 옵션이 있는 한, 무조건 자연을 만나러 가는 답을 찾는 철저한 자연주의자 아이들 덕분에 트렁크에 각기 테마 다른 모래놀이 세 세트쯤은 실어 다니기 시작했다.
얘들아, 싸우지 마!
엄마가 이만큼이나 챙겨 왔잖아
도심에서 흙을 만지기 쉽지 않지만 기회를 한번 만나면 최대치로 즐겨보자는 마음으로 '장비'를 쟁이기 시작했다. 다 같은 잔디나 흙 같아 보여도 물방울을 만나면 재미나게 변주되는 법이라서 물뿌리개도 한껏 야무지게 챙겨둔다. 잠자리채를 가져간다고 해서 실제 아이들과 내가 잠자리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하루 자연을 온몸에 담겠다는 의지를 충실하게 반영해 주는 것 같아서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제법 '탐험가'들 같은 모양새가 난다. 어린이집 숲체험 갈 때 씌우던 모자까지 잊지 않고 야무지게 써주면 엄마표 자연탐험 착장 완성. 애들이 아이템 하나 가지고 싸우려는 태세를 보이면 빽 소리 질러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얘들아, 싸우지 마! 엄마가 이만큼이나 챙겨 왔잖아." 쓱 돌아보는 아이들 뒤로 맥시멀리스트 엄마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보부상처럼 살아가던 내가 이제야 제대로 빛을 발휘하는 느낌이다.
심플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예찬하고, 맥시멀리스트보다는 미니멀리스트의 라이프스타일이 주목받는 세상. 주렁주렁 짐 챙겨 다니는 보부상 일상보다 뭐든 간결하게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엄지 척해주는 데 익숙해왔다. 도서관에 같이 가도 오늘 업무 할 맥북 한 대와 투고 커피 한 잔 말고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는 남편이 멋스러워 보이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했던 날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극단의 심플러들에 비춰보자면 수십 년을 이것저것 지니고 다니는 내 모습은 번잡하고 무겁고 때론 엉망진창 같아 보이기도 했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마주하는데 '맥시멀리스트'를 자처하는 몸짓은 꽤 쓸모가 있다. 짧고 굵게라도 아이들이 자연을 맞닥뜨릴 수 있는 순간이 생기면 휘적휘적 쓰윽쓰윽 흙과 꽃과 풀을 스치기만 하는 건 내심 아쉬웠다. 소소한 한 가지라도 도구와 장비가 있어야 자연 곳곳의 풍경과 더 예쁜 추억이 남는다는 걸 여러 차례 배웠다. 그 뒤로 무거워도 폼이 안나도 맥시멀리스트가 되기를 자처한다. 때론 미니 토트백 하나와 핸드폰만 앙증맞게 들고 네 살, 여섯 살 남매 노는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싶은데 현실은 커다란 배낭을 등산가방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양손 가득 흙놀이 실컷 할 장비를 쥐고 앞선다.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 아줌마는 이렇게 자연놀이 원정대를 이끄는 프로탐험가 몸짓을 보인다.
한번 흙을 만질 때 맘껏 느끼게 하려는 내 철저한 준비성이 유난스러웠던지, 흙놀이터에서 마주치는 엄마들, 아빠들이 수차례씩 힐끗거린다. '뭘 저렇게 단단히 챙겨 왔을까' 신기한 마음이실 거다. "네, 제가 흙놀이 한번 할 때 진심이라서요" 오늘은 미니멀리스트로 오셨을지라도 연차가 쌓이면 "저처럼 맥시멀리스트가 될 거예요" 낮게 속삭여 두기로 한다.
처리해야 할 일상 속 잡무가 많으면 나 또한 노트북과 핸드폰만 달랑달랑 챙겨서 키즈카페 가고 싶은 마음 왜 없겠냐마는, 때로는 디지털 기기를 쿨하게 방안에 넣어두고 자연 속을 향해 걷는 맥시멀리스트 엄마가 되는 순간을 꼬박꼬박 놓치지 않기로 한다. 실내 키카에서 누리는 화려한 불빛은 없지만 자연광 속에서 아이들 웃음이 더 환하게 포착되는 느낌. 눈에 보이는 놀잇감은 실내놀이터가 더 다채로워 보이는데 정작 아이들 건강한 기운은 초록초록 잎사귀와 갈색 땅바닥에서 더 강하게 솟아오르는 느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