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마라톤, 그 순간에 취하다

[아나운서 그만두고 34가지 일상기록 - 7]

by 마이 엘리뷰

새로운 영역에 도착했을 때 부지런히 하는 작업 한가지가 있다. 내 기억 속에 깃든 정보들을 총 집합시켜 애써 익숙한 조합의 단어를 찾아내는 것.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이다. 춘천 하면 '닭갈비', 담양 하면 '떡갈비', 전주 하면 '비빔밥', 대전 하면 유명빵집 ㅅㅅㄷ의 '튀소' 등등. 앗, 나열하다보니 자꾸 먹거리 조합만 머리 위로 둥둥 떠오른다. 머리를 가다듬고 다시다시, 평창 하면 '올림픽', 여수 하면 '밤바다', 부산 하면 '국제영화제', 제대로 긴 여행을 잡아가거나 혹은 의도치 않게 어떤 도시를 지나치게 된다면 우리는 꼭 한마디씩 보태곤 한다. "그래도 OO까지 왔는데 이건 해봐야지, 혹은 이건 먹어봐야지" 영화나 책에서 보아왔던 정보가 도시의 이름에 겹쳐 오버랩 될 때도 있고, 특정 도시 출신인 사람에게서 늘상 친근하게 접해들어온 이야기들이 가고자 하는 도시의 매력을 한껏 부풀릴 때도 있다.


보스턴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주변 지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설렘을 한껏 부풀리곤 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 특히 야구, 농구 마니아들을 만날 때면 "우와, 보스턴 하면 레드삭스! 셀틱스 경기죠!". 음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보스턴은 랍스터롤, 오이스터바 좋은 곳도 많은데", 스카이캐슬 열풍과 얽혀 학구열이 높은 이를 만났을 땐 '아이비리그, 하버드와 MIT'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고, 때때로 세계사 공부를 놓지 않고 꾸준히 해온 교양 풍부한 사람에게는 'Boston Tea Party'에 대한 배경지식을 감사히 청해 듣기도 했다. 도시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단어와 콘텐츠가 꽤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보니 이것저것 구경하고 체험만 해도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낄 새도 없이 시간 금방 지나가겠다고 안심했다. 그 가운데 또 놓칠 수 없었던 키워드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마라톤. 익히 늘 들어왔던 국제적인 행사 중 하나 바로 '보스턴 마라톤'이 바로 내일 시작된다. (현지시간 APR 15. 2019)


2019 보스턴 마라톤. 현지 시간으로 내일 4월 15일 월요일 짠짠!


26.2. "남편 저 숫자 뭐야?"몇 주 전부터 거리마다 내걸린 현수막에 낯선 숫자 등장. 처음엔 뭔가 했다. 화씨를 주로 쓰는 이곳에서 26.2도라고 적은 것도 아닐테고, 어딘가의 라디오 주파수도 아니고, 더군다나 지나가버린 2월 26일을 구태여 봄날 한 가운데 써둔 것도 아닐 테고. 소소한 누군가의 이벤트성 현수막이라고 보기엔 보스턴 시내 전체가 너무나 26.2 투성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오래지나지 않아 금세 알아차렸다. 마일(mile)을 적어둔 거였구나. 마라톤하면 한국에서는 늘 42.195km라고 이야기했는데, 마일로 바꾸면 26.2mile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34살이 되어서야 알아차리다니. 화씨와 섭씨, 파운드와 킬로그램 단위가 여전히 헷갈려서 아직도 검색창에 변환기를 찾아 호환되는 숫자를 찾아내곤 하는데 마라톤의 26.2mile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보스턴 마라톤의 존재감을 알아차렸고 서서히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뛸 것도 아니고, 마라톤 종목을 평소 관심있게 지켜봤던 것이 아님에도, 한 도시를 대표한다는 키워드, 그 이벤트에 대한 상징은 보스턴 정착 한달 남짓의 이방인을 서서히 설레도록 이끌었다.


26.2 어렵지만 그래서 더 도전하고픈 중독성 있는 숫자


설렘 폭발은 바로 금요일 오후. 거리와 전철 곳곳에 교통수단 통제에 대한 알림글이 빠르게 돌아갔다. 월요일은 마라톤 때문에 근교지역에서 보스턴 시내 중심으로 들어오기 꽤나 힘들거라는 이야기, 마라톤 출전자들과 더불어 관광객들이 보스턴 시내에 많이 들어와있기에 웬만한 레스토랑가서 식사하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들도 시시각각 들려왔다. 이 말은 곧 원래대로 집에서 서둘러 나와도 수업시간에 늦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으며, 가뜩이나 붐비는 통근시간대 commuter rail과 보스턴 전철T도 그날만큼은 원활히 제 시간에 이용할 수 있을지 복불복이라는 것, 더불어 워낙에 사람들이 몰릴테니, 좋아하는 카페나 식당에서 여유롭게 한 끼 챙기기도 어려울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평소 한국에서의 나였다면, "그날 다니기 힘들겠네. 그냥 최대한 집에 있을까" "사람 너무 많아서 어딜가나 고생하겠어" 정도로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실제 춘천 마라톤이 펼쳐질 때 출퇴근 길 통제 여부가 가장 큰 관심사였으므로. 퇴사한 뒤 자리하는 공간과 살아가는 모양새가 달라지니 자연스레 생각을 바꿔먹게 된 내 자신 스스로가 신기하다. 모든 게 여전히 경험해보고싶은 이방인 두달 차에겐 불편함에 대한 걱정마저 두근거림으로 부푼다. "이런 걸 또 언제 경험해보겠어"라는 신비한 문장 하나로 인파에 휩쓸릴 걱정은 뚝. 지켜볼 재미는 물론이요, 그리고 나만큼이나 이곳이 낯설 이방인들이 같은 공간에 그득할 것이라는 생각에 묘한 편안함도 스르륵 찾아오고야 만다.


월요일 전철 통제를 알리는 거리거리마다의 알림들
여기저기 모두 마라톤 이야기로 들뜨는 순간. 보스턴은 마라톤이지!


왠지 달리는 사람들의 기운을
가까이에서 전수받으면
나마저도 함께
뜨거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설렘요소 또 하나, 달리는 사람들로부터 전해질 그 뜨거운 에너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익숙하지 않은 나라 어디에서 온 누구라도 상관없다. 누구든 힘껏 달려내는 모습만 봐도 함께 심장이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지 않던가. 어느 누구든, 기어코 트랙을 완주해낼 거라고 생각하니 덩달아 신이나기 시작했다. 정해진 26.2마일의 과제를 완성해 낼, 출전자 그 누군가의 기운은 국적과 나이, 성별 불문, 힘찬 박수를 충분히 이끌만 하다. 왠지 달리는 사람들의 기운을 가까이에서 전수받으면 나마저도 함께 뜨거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26.2마일을 통과해 내려고 마음먹은 자들의 단단한 결심이 흐물흐물해져가는 내 자신 스스로에 대한 온갖 의지들에 탄력을 더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자꾸만 보고싶어진다. 마라톤, 이 여정에 동참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기 전전날 이미 분위기체감하러 나온 이들로 북적북적
출전하지 않더라도 너도나도 무언가를 달려내고 있다는 마음만큼은 모두가 닮아있기에


비슷한 마음들이 도로 곳곳에 가득했다. 나만 신난 게 아니었구나! 누군가의 몸짓을 응원하고 싶은 열망들은 모두가 닮아있었다. 에너지가 응집되었다가 폭발할 finish 라인에 발을 슬쩍 대어보고 그 언젠가는 26.2마일에 일부라도 동참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조심조심 품어본다. 아무리 가까이 지켜보더라도 직접 몸으로 뛰어드는 것만큼 더 뜨거울 수 있는 일이 어디있을까. 그 어떤 간접체험보다 값지고 귀한 달리기가 되겠지. 비록 100m달리기도 겨우 22초 정도에 뜀박질하곤 했던 나이지만 (그만큼 달린다는 것에 대해 소질이 없음을 익히 잘 알고는 있지만), 빨리 달리는 능력보다는 끈질김이라는 자질이 더 크게 반짝일 것 같은 마라톤은 그 언젠가, 언젠가를 위해 내안의 버킷리스트로 고이 담아둬보고 싶다. 인생에 한번쯤은 최대한 뜨겁게 끓어오를 사람들 틈 속에서 그들의 에너지로 샤워해보고 싶다고 희망해본다. 아마도 땀냄새로 뒤범벅 될 옷이 '나 지금까지 잘 달려왔노라'고 힌트를 쥐어줄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의 환호성, 응원의 박수소리로 '더 잘 달리고 싶다'고 힘껏 욕심낼 수 있겠지. 이미 그러한 영역에 용기 있게 출전한 사람이 새삼 부러워진다. 땀으로 젖을 월요일, 그들의 옷자락에 괜한 탐이 난다.


나도 언젠가는! 보스턴 마라톤


당장 출전하지도 않을 이 '마라톤'이라는 영역에 반해버린 이유. 아마 당분간 내가 걸어가야할 길과도 너무나 닮아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방송사에서 그때 그때 해냈던 무수히 많은 생방송 진행의 미션들이 단거리 경주와 닮았다면 지금 걷고 있는 이길, 퇴사자가 향해야 할 매일매일의 순간은 마라톤 트랙에 서 있는 기분과 참 유사할 것도 같다.


매일매일 같은 시간 성실히 임했던 저녁뉴스 앵커의 역할이 100m 경주와 비슷했다면, 종종 특집 프로그램이 잡혀 야외에서 생방송으로 해내곤 했던 공개방송이나 이동보도국 진행미션은 200m 달리기 경주에 비할 만하겠지. 물론 섬세한 기술과 민첩한 능력, 남들보다 분명히 뛰어나야 하는 무언가의 무기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시간'개념으로만 보았을 때 정해진 시간 달리고 나면 결승선이 오래지 않아 보이는 게임의 연속이었다. 주말과 휴일 가릴 것 없이 베테랑 선배님과 함께 2시간씩 호흡을 맞춰 끌어갔던 한낮의 생방송 음악프로그램은 파트너와의 호흡이 중요하므로 400m 릴레이 경주와 닮아있었겠지. 작가언니와 기술국장님과 능숙한 선배님의 호흡이 마치 바톤터치의 순간, 절묘한 콜라보레이션과 닮아있기에 .


나도 당신도, 지금 달리고 있는 우리 모두를 아낌없이 응원해보며
결승점, 언젠가 우리 모두의 달리기에도 끝은 보일 거라고.


반면 정해진 방송시간, 같은 미션을 벗어난 삶은 마라톤과 좀 더 닮았다. 정해진 방향이 있고 뜻하는 목표는 제법 분명한 것도 같은데 결승선에 다가서기란 참 오랜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퇴사자의 삶, 그이후를 살아낸다는 것. 언젠간 목표한 바에 가 닿을 테지만, 순간순간 내가 finish 라인을 밟을 순간의 환희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가까이 가 닿더라도 언제 닿을지 모르고, 닿울 수 있기는커녕, 숨이차서 중도 포기하고 또다른 단거리 미션을 찾아 헤맬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정해진 마라톤 트랙을 벗어나 에라모르겠다 알 수 없는 길을 헤매다가 결국 배고픔에 지쳐 구석에서 허덕이다가 낯선사람에게 발견되는 비극을 마주할 수도. 지금 이 미션은 그만큼 오랜 인내를 원할 것이고 흘려야 할 땀은 끝이 보이지 않아서 그 어떤 경주보다 지겹고 잔인할 것 같기도 하다. 26.2마일만큼이나 긴 이 여정은 나를 과연 어떻게 달리게 만들까.



날씨가 좋든, 날씨가 궂든 내일 마라톤은 이어진다. 준비현장이 한창이었던 어제, 보스턴은 참 따뜻하고 화창했지만, 정작 경기가 진행되는 내일 월요일은 아마도 비가 흩뿌릴 예정이라고 하니... (출전할 것도 아닌데) 나, 살짝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구경자, 관람객이 심술궂은 날씨 때문에 잠깐 시큰둥해진다 한들, 선수는 날씨 탓을 하지 않을 테지. 비가 좀 내릴 거라고 해서 한껏 쌓아온 열정을 꼬깃꼬깃 접어넣고 우산으로 안전하게 가려넣는 경우가 있을까. 쉬이 가실 줄 모르는 보스턴 지역의 찬 기운이 또 다시 찾아들든, 비바람이 거칠어 시야를 가리든, 뛸 사람은 계속해서 뛰겠지. 많이 버티고 버텨본 사람은 나를 둘러싼 상황이 어떠하든, 그냥 묵묵히 뛰고 또 뛴다. 소위 '존버'라고 불리는 길을 택하고 일단 출발했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완주할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것만 생각할 테니까. 햇빛이 들든, 무심하게 사라져버리든, 비가 세차게 뿌리든, 감쪽같이 그치든.


내일 드디어 짠, 시작될 123번째 보스턴 마라톤, 보스턴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큰 이벤트 하나. 누군가의 탄탄한 달리기, 오래 달리기의 여정이 수많은 구경객들의 가슴에 힘차게 주문을 걸어줬으면 좋겠다. 나도 이렇게 달려냈으니, 당신도 멈추지 말라고. 26.2마일, 아 진짜 끝나지 않아서 미칠 것 같은 그 긴 여정의 순간들, 나도 달려냈으니까, 당신도 어찌됐든 끝을 보는 날이 있기는 있을 거라고. '땀'으로, '눈물'로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 솔직히 다 달리고 나서 결승선 finish line에 딱히 별 게 없다고 할 지라도 '당신은 충분히 위대하다'고 서로 박수보낼 수 있는 그 따뜻한 응원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달리기 아닐지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나도 당신도 우리모두 잘 달려내고 있는 거라고, 지금 10마일쯤은 왔는지 아직 3마일도 채 안 달린 건지 그건 모르겠지만, 서로서로 땀에 흥건히 젖다보면 끝내 만족할 만한 그 지점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완주해내리라고.

봄날같던 보스턴, 지난 토요일 copley 풍경
"남편, 우리 같이 한번 출전해보지않겠어?' 도전 버킷리스트


참, 그나저나 어쩐담. 남편에게 "보스턴 왔으니 그래도 마라톤 한번 뛰어봐야하지 않겠어" 철없이 실없이 이야기했는데 이 약속은 지킬 수 있을까. 말도안되는 빈말로 훠이훠이 사라져버리고 말 것인가. 버킷리스트에 쉽게 담기에는 너무도 어렵고 대단한 미션이 아닐까 싶어서 괜히 주눅부터 드는 마라톤 관람 Dday-1. "마녀체력"의 저자 이영미 선생님처럼 탄탄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는 그날이 내게도 찾아올까, 덧없이 상상해보며 분홍새 런닝화를 살포시 꺼내둔다. 누군가의 뜀, 넘치는 에너지가 나의 어설픈 달리기 몸짓에도 그 언젠가 촘촘히 스프링을 달아줄 수 있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