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과 함께일 땐 나도 내 몫의 길을 제법 잘 걸어냈었지.
사랑에 빠진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M은 미친 자신감이 멋있었지. Y는 참 순박하고 호쾌하게 웃었어, D는 너무너무 귀여웠고.
한 명 한 명 다 멋진 사람들이었는데 말이야. 근데 그때 나는 어땠더라? 지난날의 사랑을 떠올리면 내가 사랑한 이들의 모습만 선명하게 떠오를 뿐 어쩐지 나는 흐릿하다. 그에게 온 정신이 팔려 세상은 물론 나까지 납작해졌던 시간들.
J와의 첫 만남이 연애로, 호감이 사랑으로 익어간 시간들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그 시작은 북한산이었지.
ㅣ그날 북한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말이야
첫 만남에 우린 둘 다 산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음 데이트는 바로 등산으로 정했다. 이 만남은 사실 속셈이 따로 있었는데, 우린 사람을 산에 데려가 보면 인성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힘든 상황에 처하면 본모습이 나오게 마련이니까. 비록 서로가 생각하는 힘듦의 정도가 많이 달랐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린 빠르고 효과적으로 서로를 파악하려는 각자의 속셈을 가지고 북한산 입구에서 다시 만났다.
제법 쌀쌀한 2월이었다. J는 자기만 아는 동굴이 있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산에서 그를 다시 만나 설렜는데 게다가 동굴이라니, 로맨틱해! 신이 나서 이런저런 질문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걸었고 우리는 얼마 안 가 등산로를 벗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네발로 넓적 바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라.. 제법 빡세네,,) 살짝 긴장했지만 길이 재밌네요 호호 따위의 감탄을 날리며 대화를 이어갔다. 웃고 떠들며 걷다 보니 이번에는 길이 끊겨있었다. ( ;;; 뭐지 이거) 비탈길로 패인 1m 거리의 골을 점프해야 했다. J가 먼저 던진 가방이 건너편에 닿지 못하고 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는 멋쩍은 듯 골짜기를 내려가 가방을 주웠고 내게 괜찮은지 슬쩍 물어보곤 가볍게 저편으로 뛰어 넘어갔다. 가방 꼴은 되지 않길 바라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뛰었다.
골짜기를 건너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젠도 없이 가볍게 온 터라 당황했지만 죽기야 하겠어, 하며 그의 뒤를 쫓았다. 대화가 조금씩 줄었고 우리는 드디어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은 내가 상상한, 입구가 크고 넓은 굴이 아니었다. 여우들이 오간다는 작은 구멍의 여우골이었다. 이번에도 J가 날쌘돌이처럼 구멍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이제 내가 올라가려는데 구멍에 몸이 끼여버렸다. 몸통이 끼여 네 팔다리만 버둥대는 꼴이라니. (쪽팔려 8ㅅ8)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럽고 난감했다. J가 위에서 내민 손을 부여잡고 거의 건져지듯이 들어 올려졌다. 휴, 이만하면 모험은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웬걸. 동굴을 빠져나오니 눈발이 제법 거세져 있었다. 코앞이 백운대 정상이었는데 눈에 파묻혀 길이 보이지 않았다. J는 눈 덮인 바위를 가리키더니 이것만 오르면 된다고 말했다. 어림잡아 60도의 경사였다. (... 좇됐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조금씩 추워지고. 믿었던 날쌘돌이마저 계속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니 까딱하다간 죽겠다 싶었다. 징징거릴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못 올라가면 진짜 큰일 난다. 나는 J의 엉덩이만 보며 바위를 기었다. 로맨스가 다큐가 되는 순간이었다.
ㅣ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이날의 북한산행은 이야기할 때마다 디테일이 변한다. 골짜기를 못 뛰겠다며 장장 30분은 징징댔던 것 같기도 하고, 내 배가 낄 정도의 여우골을 J는 어쩜 그리 사뿐히 지나갔나 싶기도 하고, 백운대를 코앞에 두고 긴장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심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매번 조금씩 다른 모험담임에도 이날이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길을 헤치며 의지했던 최초의 하루였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후로 우리는 무난히 연애를 시작한다. 우리의 연애는 여느 연애처럼 달콤하고 살벌했고 뻔한 듯 유일한 둘만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J와의 연애는 내게 함께 산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의 앞엔 각자의 길이 놓여 있었다. 때론 겹치기도 때론 멀리 떨어지기도 했던 두 길을 앞에 두고 우린 걸음을 함께 했다. 우린 함께하자 약속했지만 결국 제 몫의 길은 제 발로 걸어가야 함을 알았다.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종종 들여다봐주고 격려하고 때론 손을 뻗어주는 것뿐. 날쌘돌이처럼 저만치 앞서가서야 빼꼼 나를 살피는 그를 보며 서운하고 외롭다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런 그라서 좋다. 우리의 길을 괜스레 하나로 합치려 하지 않고, 내 몫의 걸음을 덜어가려 하지 않고, 자신의 길부터 충실히 걸어내는 그라서. 함께 걷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
언젠가 우리의 사랑도 한 단락 마무리되고 J와의 사랑을 돌이켜볼 날을 기대한다. 한두 단어로 표현될 그의 멋진 모습만큼이나 그 곁에서 부딪히고 깨졌던 멋진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를 것 같다. 이 사람과 함께일 땐 나도 내 몫의 길을 제법 잘 걸어냈었지. 그런 나를 참 많이 응원하고 함께 해줬던 사람이었지 하고. 내가 좀 더 나일 수 있도록 함께 해주는 사람. J를 사랑하게 된 순간은 그런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