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Myeongjae Lee
KE1324.
19:50→20:35, 탑승구 6, 좌석 32A
토요일, 저녁식사 무렵 아내가 돌아왔다. 온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다. 퇴근 후 평범한 어느 날의 저녁식사인 것처럼. 애정하는 정초밥에서 '차돌박이 숙주볶음'을 배달시켜 덮밥처럼 먹었다. 장염에서 회복 중인 둘째는 강된장과 콩나물무침을 반찬삼아 소량의 식사를 시도했다. 시험 종료 기념으로 엊그제 시켜 먹고 남은 배떡으로 이미 배를 채운 첫째도 조금만 먹겠다며 앉았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밥시간이 즐거웠다. 나에게 밥은 연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날이 대부분인데, 밥이 맛이 있었다.
설거지는 내일로 미뤄놓고 안방에 집결했다. 내일 아무 일정도 없는 첫째만 빼고. 내일은 세수를 안 해도, 머리를 안 감아도 되고, 잠옷 차림으로 하루종일 온전히 집에만 있어도 된다는 행복감을 벌써부터 누리는 것 같다. 집순이, 아니 방순이라 불러야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프로야구 중계방송을 틀어 놓고 동시에 책을 읽는 묘기를 부렸고, 아내는 옆에 엎드려 누워 게임에 몰입했다. 둘째는 패드로 글을 쓰는지 그림을 그리는지 무언가를 부지런히 하면서 엄마가 하는 게임에 이쪽, 저쪽 훈수를 두며 참견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잠을 '잘' 못 잔 지 꽤 오래되었는데, 책과 핸드폰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잠이 물밀듯 밀려왔다. 이런 느낌, 정말 오랜만이었다. 잠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도 졸음이 불가항력으로 쏟아지는 그 순간, 그 느낌이 좋다고 느꼈다. 평범한 일상은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매주 내려와야 하나.
어려서부터, 함께도 좋지만 혼자가 더 좋은, 혼자 잘 놀고 잘 지내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다녔고, 성인이 되어서 여행도 주로 혼자 다녔다. 갱년기, 나에게도 호르몬 변화가 생긴 것일까. 퇴근하고 거처로 돌아오면 뭘 어째야 할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힌다. 흥청망청 삶을 낭비하는 것 같고, 길을 잃은 느낌도 종종 든다. 이런 내가 낯설고, 약간은 당혹스럽다.
혼자일수록 몸과 마음을 더 돌보고 챙겨야겠다. 평범한 그 일상이 다음 달에 올지, 내년에 오게 될지, 퇴직할 때까지 오지 않을지 기약 없는 이 상황에서 그날이 도적같이 왔을 때 그 일상을 건강하고 유쾌하고 감사하게 누릴 수 있도록 씩씩하게 지금을 잘 살아야겠다.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보안검색대를 통과할 때까지도 아무 일 없었는데, 불과 몇 분 뒤 연결 편 사정으로 항공편이 지연 예정이라는 연락이 왔다. 카톡, 항공사 앱 알림, 이메일, 종류별로 난리다. 연착 비행기를 기다리며 주말에 찍은 핸드폰 앨범 속 제주를 돌아보았다. 올 때마다 틈틈이 식구들과 사진을 찍는데, 옷도 모자도 매번 똑같고 후줄근하다. 다음에 올 때는 육지에서 옷 같은 옷들을 좀 갖다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