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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Lee Oct 10. 2024

2024. 10. 1.

서른일곱 번째 ©Myeongjae Lee

KE1320, A220-300

19:35, 탑승구 5→3, 좌석 49A


©Myeongjae Lee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


오래전, 한 선배가 주말에 어린 조카가 다녀갔다며 그런 말을 했다. 

가끔씩은, 내가 육지로 돌아갈 때 아내와 아이들도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해도 괜찮다. 여전히, 언제나 '오면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 날은 없으니까. 


'잘 지내는지 문득 궁금한' 사람, '이따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가끔은 밥 한 번 먹고 싶은' 사람으로 늙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인생 좌우명까지는 아니지만, "곱게 늙자"는 말을 자주 되뇐다. 뭐라 딱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막연하게나마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배움을 멈추지 않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는 살짝 자신이 있었는데, 요즘 하고 다니는 모양새를 보자니 콧방귀도 안 나온다. 이 역시 치열하게 애쓰고 발버둥 쳐야 되는 일 같다.


"에릭슨은 성숙한 어른으로서 정체성을 가꾸는 단계는 다른 사람을 돌보고 베풀되 그렇다고 자기 자신은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존재의 박물관> p.316, 스벤 슈틸리히 지음, 김희상 옮김, 청미, 2022



최근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제주의 변화는 늘 무쌍하다. 

이곳저곳 건물들이 새로 올라가고, 새로운 간판도 눈에 많이 들어온다. 아내와 종종 가던 샐러드 전문 식당도, 옛 직장 동료들과 몇 차례 갔던 발리 음식점도, 올해 초 아이 졸업식 꽃을 샀던 꽃집도, 마리모를 구경했던 수족관도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없어졌다. 한 번도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오가며 늘 지나던 길 옆 옷가게도 미용실로 간판을 바꾸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어려운 시기지만, 무언가 끊임없이 생동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곳에서의 자영업은 정말 만만치 않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징검다리 연휴라 월요일 하루 연차를 냈다. 사무실은 미친 듯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발도 했고, 옛 직장 후배와 만나 잠시 잔을 했다. 반가웠다. 1년 하고도 개월이 지났는데 여전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애정하는 선배가 누님과 함께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에 내려왔다. 선배의 누님은 거의 20년 만이었다. 반가웠다. 아내까지도 모두가 서로 잘 아는 사이여서 함께 만나 커피 한 잔과 저녁식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함께 가까운 의료원을 방문해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 제출했다. 6년도 더 전에 어머니는 예고도 없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시면서 "알고 있으라."라고 하셨다. 한 달 안에 등록증 카드를 수령할 수 있다고 하는데, 카드를 받으면 적절한 시기에 어머니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이야기해야겠다. 인생도 성실하게 살아가고, 죽음도 성실하게 준비하며 살고 싶다.


월요일이어서, 중간고사 전투를 치르러 가는 큰 녀석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장렬하게 부상을 입고 나온 아이를 픽업해 올 수 있어서 좋았다. 장모님의 황혼 은퇴 소식도 들었다. 결혼과 동시에 시작된 30여 년 간의 경력단절을 뒤로하시고, 간호사 재교육을 받으신 뒤 12년 가까이 일을 하셨다. 당신께서는 알바라고 하시지만,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실 정도로 숙련된 전문가셨다. 장모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Myeongjae Lee



멀다.

집을 나서 제주공항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 26분이 걸렸다. 임시공휴일의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길이 부분 부분 막혔다. 버스 안에서만 1시간 55분을 보냈다. 다소간의 강박이기는 한데, 보통 "타고 가던 버스가 이런저런 사고가 나서 그다음 버스를 타도 비행기 탑승이 가능한" 시간대의 공항행 버스를 탄다. 덕분에 이렇게 다행스러운 날도 있지만, 대체로는 공항에서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비행기를 못 타면 이만저만 곤란한 상황이 올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여성 기장님이 운전하는 항공기에 당첨되었다. 흔치 않은 경험은 늘 반갑다. 난생처음은 아니지만, 올해 서른일곱 번의 비행 중에서는 처음인 것 같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여성 기장의 비율은 평균적으로 5%, 가장 높은 인도의 경우도 12%에 불과하다고 한다. 여성들에게는 진입하기가 만만치 않은 직종인가 보다. 아무튼 멋지시다. 착륙 역시 부드럽게 해주셔서 감사했다.


https://namu.wiki/w/%EB%B9%84%ED%96%89%EA%B8%B0%20%EA%B8%B0%EC%9E%A5 (최근 수정 시각: 2024-09-19 22: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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