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각자의 주홍글씨

Adultery to Able

by 김명준

세상은 언제나 고통의 밀도로 가득 차 있다. 새벽 첫 전철이 들어오는 플랫폼 위에서도, 대도시의 번잡한 교차로 한복판에서도, 혹은 시골 들녘의 적요한 정적 속에서도, 우리는 저마다 초조하게 두드리는 심장의 박동을 안고 살아간다. 불의한 사고가 예고 없이 찾아와 삶을 뒤집어놓기도 하고, 작게는 관계의 균열이나 내밀한 자책감 같은 감정적 통증이 아물 여유도 없이 연쇄적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어떤 이는 구석진 지하철 좌석에서 해고 통보를 떠올리며 무너진 어깨로 앉아 있고, 또 어떤 이는 대학 기숙사 침대에서 첫 실연의 아픔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낸다. 객관적으로는 해고가 실연보다 더 심각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순간 각자가 느끼는 절망의 깊이는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수위의 아픔을, 또 같은 빈도로 겪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어릴 적부터 반복되는 상실과 실패 속에서 체념과 꿋꿋함을 동시에 배우고, 또 어떤 이는 오랜 평온 끝에 처음 찾아온 큰 상실 앞에서 날것 그대로의 비탄을 체험한다. 객관적 지표로 환산될 수 없는 고통의 스펙트럼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며 어긋난 시차로 성숙한다.

시간은 고통의 결을 달라붙듯 매만지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그 결을 정교히 마모시킨다. 커다란 상처가 뽀얗게 희미해지는 과정처럼, 반복된 상실은 통증 자체의 낯섦을 앗아간다. "그냥 그런 거지"라는 말은 냉소의 껍질을 빌린 체념으로만 읽히지만, 사실 그 뒤편에는 스스로 입증한 생존의 현장이 겹겹이 접혀 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이 건네는 "나도 부모님 다 보냈어, 다들 겪는 일이야"라는 말처럼, 아픔을 관통해 살아남은 경험자는 고통을 쉽게 일반화하려는 것도, 타인의 절망을 평가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는 치유와 회복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한 진실을 체내에 봉합해 왔고, 그 진실이 이미 일상의 일부가 되었음을 굳이 포장하지 않을 뿐이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처음 고통을 맞닥뜨린 사람에게 너무 일찍, 너무 맥락 없이 전해질 때이다. 맑게 열린 상처가 굳은살도 만들지 못한 채 공기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에게 "다들 겪는 일이야, 곧 지나간다"는 문장은 사포처럼 거칠다. 듣는 이에게는 "네 고통은 특별하지 않아"라는 선고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갑작스럽게 잃은 스물여섯 살 누군가에게, 첫 상실의 충격은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는 경험이다. 경험자의 눈에는 수많은 통증들이 이미 지나온 길 위에 덧칠된 무늬일지라도, 초행자의 눈에는 그 한 번의 상처가 세계의 모든 빛을 지우고 소리를 비트는 전부가 된다. 고통이 극도로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 진폭과 주기를 결코 함부로 환산하거나 상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미 아픔을 견디는 법을 체득한 사람은 처음 상실을 경험한 이에게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까. 무엇보다 고통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덜어 주려는 충동을 잠시 보류해야 한다. 위로나 조언은 슬픔이 그 사람 내부에서 일정 정도 발효될 시간을 허용한 뒤에야 효과를 갖는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상담했던 어떤 심리치료사가 말했듯, "빨리 일어서라"는 격려보다 "넘어져 있어도 괜찮다"는 허용이 더 깊은 치유를 이끌어냈다. 통증이 개인적으로 고립된 듯 보일 때는, 그것이 결코 비정상도 실패도 아니라는 사실을 언어보다 앞선 태도로 보여 주어야 한다. 억지로 균열을 봉합하려 들지 않는 침묵 속 동행이 공허한 위로보다 깊다. 그리고 시간이 고통을 둔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삶의 불가피한 동반자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을 은근히 시사할 수 있다면 좋다. '괜찮아질 거야'보다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이 더 멀리 간다.

그러나 세상에는 더욱 교묘한 폭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과거를 근거로 미래를 짐작하며, 가능성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낙인찍는 일이다. "그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언젠가 같은 상처를 자녀에게 물려줄지도 모른다"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염려지만, 실제로는 무제한의 입증을 요구하는 감시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며 자란 누군가가 성인이 되어 아무리 다정한 배우자, 세심한 부모가 되려 애써도 "그래도 혹시 모르지"라는 의심의 실이 따라붙는다. 비난은 논박할 수 있지만, 가능성은 반박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증거를 제시해도 "그래도 혹시 모르지"라는 단서 하나면 다시 의심이 되살아난다. 당사자는 영원히 잠재적 가해자로 호명되고,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시험으로 유지된다. 이처럼 낙인의 가장 큰 폭력은 확정이 아니라 '가능성'에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이 있다. 인간의 인격은 과거의 단순한 모방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과거가 미래에 기계적으로 되풀이되지 않는다.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윤리적 궤적으로 성장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기억은 복제되지 않고, 다시 사유된다.

아동학대 연구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해자의 70% 이상은 실제로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며, 학대를 당한 사람들 중 다수는 오히려 그 기억을 교훈 삼아 더욱 세심한 돌봄의 윤리를 체득한다. 우리는 지나간 경험을 다르게 해석하며 새로운 결심을 세울 능력을 지닌 존재다. 때로는 바로 그 고통이 되풀이를 막는 가장 강력한 윤리적 브레이크로 작동한다.

그렇다면 낙인은 반드시 지워야 할 흠결일까. 헤스터 프린이 간통의 "A"를 'Able'과 'Angel'로 바꾸었듯, 낙인은 지워지지 않지만 다시 쓸 수 있다. 상처를 금실로 수놓듯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면, 과거는 족쇄가 아니라 윤리적 초능력으로 변환된다.

가정폭력의 상흔을 안고 자란 누군가가 피해자 상담소에서 일하며 "제 상처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라고 말할 때, 그는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 의미는 바꿀 수 있다는 인간의 숭고한 능력을 보여준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상처를 부인하지 않는 의식화, 상처가 길어 올린 가치를 서술하는 해석 전환, 그리고 그 서사를 신뢰할 만한 타인과 공유하여 사회적 현실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새긴 문양은 같은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아직 고통을 모르는 이들에게 편견의 가시를 무디게 하는 완충재가 된다.

반면 아무런 큰 아픔 없이 자란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고통 앞에서 미숙할 수 있다. 그들은 애도와 수용의 내적 매뉴얼을 충분히 연습하지 못했기에, 돌발적 비극을 만나면 현실을 부정하거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고통을 외부화하곤 한다.

강남에서 자란 서른 넘은 누군가가 첫 취업 실패 앞에서 "지금까지 실패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며 심각한 우울에 빠지는 일처럼, 혹은 작은 충격에도 자기 세계가 와르르 무너지며 스스로를 무능력한 존재로 단정 짓기도 한다. 무통(無痛)은 면역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상처 경험자는 자신의 초연함을 과신해 타인을 훈계하기보다, 무통의 상대가 처음 경험할 당혹감을 이해해야 한다. 동시에 무통의 사람은 가능성 담론으로 타인을 재단하기 전에, 고통이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주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

모든 인간은 영원히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공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언어를 던지고, 손을 내밀고, 옆자리에 앉는다. 아픔을 '그냥 그런 것'이라 일축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냉혹한 현실과, 동시에 누군가의 난생처음 절망을 다정히 어루만져야 하는 윤리적 요청 사이에서 우리는 균형을 잡는다.

결국 우리는 각자 다른 고통의 지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의 지도에는 이미 수많은 상처의 흔적이 표시되어 있고, 어떤 사람의 지도는 아직 대부분이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지도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를 고립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준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위로하는 이유다.

이 모순된 두 과제를 기꺼이 떠안는 일, 바로 그것이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인간성을 증명하는 방식이며, 서로에게 끝끝내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다.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연대, 그 느슨하고도 따뜻한 연결이야말로, 각자의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를 지켜내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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