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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김중일

김명준의 시 담론 - 내가 사랑하는 시들

by 김명준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발견한 시이다.

가장 큰 직업으로서의 시인
—아무도 접속하지 않은 채널의 접속을 기다리며 하는 상념

김중일



지금 만나러 가는 너의 직업은 시인이라고 한다.
시인도 직업일까.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너는 묻지도 않았는데 만날 때마다 대답한다.
시인은 가장 큰 직업이다.
마치 스스로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나는 그것을 다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가장 큰 직업'이란 말이 좀 걸린다.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 건 최근의 일이다.
'가장 큰 직업'이란 당최...
무엇일까.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

열심히 노동하여 집을 지으면 폭풍이 와도 튼튼한 집이 남지만
열심히 밤새 지은 '시'라는 채널의 관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나누고 허무는가에 달렸다.
아침 해와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는,
실체가 남지 않는 일을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가장 큰 직업'은 직업이 아니라는 뜻이 분명하다.

무작위로 배정되는 한 편의 채널에 접속을 기다리며 들었던 상념들을 서로 나누며,
빨래 개기를 마친 너는 노동의 대가로 배달 음식을 시킨다.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함께 있는 공간을 둘러보며 한 마디 덧붙인다.

이런 수십 개의 채널을 모아놓은 한 권의 시집은 말이야
다림질까지 한 듯 기막히게 반듯이 개어놓은 시인의 속옷 같단 말이야.
세상에 존재하는 표백제로는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 미량이나마 껴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다시 빨아야 하는.
빨다가 갑자기 눈물이 톡 터질 정도로 허무하기가 그 어떤 시적 수사로도 비유할 수 없는.


2022 현대시작품상 수상작이다. 시인은 직업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직업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직업은

직업 :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급료를 받고 자기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한 가지 일에 종사하는 지속적인 사회 활동

이라 한다. 김중일 시인은 시에서 '시인'은 바로 '가장 큰 직업'이라고 했다.



마치 스스로에게 드는 미심쩍음에게 하는 대답인 것처럼

김중일 시인은 자신이 시인임에도 '시인'을 '직업'이라 부르는 것을 명쾌히 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시인'이 '직업'이 아닌 다른 뭔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테다. 시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시인도 직업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기 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대부분의 시인은 다른 일을 같이 하며 보통 시에 관련한 일로는 제대로 돈을 벌기 힘든 상황이다. 시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게 시집을 출판하면 그 수익으로 생계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학이 그렇듯이, 등단을 한 작가라도 생계에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1만 권 이상의 시집을 팔아야 하며, 이는 시인들의 '아이콘'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시인'중에서도 '전업시인'인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김중일 시인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시인이 과연 직업 인가 하는 끝나지 않는 질문에 각오라도 하듯, 아니면 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긍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그는 '시인'을 단순히 직업이 맞다고만 긍정하지 않고 '가장 큰 직업'이라 했다. '시인'이 직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의 의심은 '가장 큰'이라는 수식언에서도 드러나 '그 말은 어쩌면 직업 따위가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커진다. 그러고는 '식상하게 삶이나 죽음 같은 것만 아니면 나는 상관없다.'라고 한다. 삶이나 죽음은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으며 특히 시인에게는 식상한 주제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관찰하는 사람이므로. 삶과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어느 것보다 추상적이다. '가장 큰 직업'처럼 추상적인 말을 또다시 추상적인 말로 풀어내면, 상쾌하지 않을 것 같다. 아마 그는 '가장 큰 직업'의 의미를 더 알기 쉬운 말로,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밤새 지은 '시'라는 채널의 관건은
지극히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슬픔을 나누고 허무는가에 달렸다.

'시'도 결국은 설득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과 감정이나 복합적인 느낌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니 말이다. 시를 쓸 때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이야기하는 게 좋을 때가 많다. 보편적인 것이라면 이미 널리기도 했고, 보편적인 것을 독특하고 개성 있게 인상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김중일 시인은 사랑도, 희열도 아닌 '슬픔'을 '시'의 관건으로 삼았다. 나 역시 시인은 바로 그런 자라고 생각한다. 슬픔을 온몸으로 한껏 끌어안고 느끼고 적는 사람 말이다. 세상의 슬픔을 곧이곧대로 마주하기를 다짐한 자들 말이다. 살면서 다양한 사랑과 환희를 마주하지만, 결국에는 끝에 도달하면 남는 것은 허무와 그 슬픔일 것이다. 그 슬픔에 때로는 지치기도 할 테고, 때로는 슬픔에서 다시 행복이나 희망이나 하는 것들을 피워내기도 하는 게 바로 시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슬픔을 잘 정돈하고 가다듬어 글로 적을 때 시인은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그 슬픔을 온전하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면서도 시인 본인은 그 슬픔에 완전히 침식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큰 슬픔을 허물어야 한다고 한 것이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아침 해와 함께 흔적 없이 증발하는,

감정에 휩싸여 시를 적어 내려갈 때의 그 기분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한 편의 시를 완성하더라도 다음 날이면, 시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우리는 항상 그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므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사람은 가장 깨끗한 상태가 된다. 망각이라는 경험을 통해 시인은 전날 밤 시를 쓰던 자신과는 또 다른 내가 되어 과거 자신의 시를 마주한다. 망각은 축복이라지만 자주 비극을 불러온다. 시를 통해 감정을 흘겨볼 수는 있어도 완전할 수는 없다. 시는 감정의 질 낮은 복사본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사일 수도 있다. 시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남지 않은 일은 직업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이 김중일 시인의 의견이다. 시인 말고도 실체가 남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보다 많다. 배우나 스포츠 선수, 교사 등도 모두 실체가 남지 않는다. 모두 결과물이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지만 마땅히 직업이라 불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실체가 남지 않아서' 시인이 직업이 아니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인과 배우, 스포츠 선수, 교사와의 차이는 어느 곳에 있는가? 나는 그것이 '돈벌이'가 되는지 여부에 오로지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슬프게도 돈이 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표백제로는 아무리 빨아도 결코 다 빠지지 않는 슬픔의 때가 미량이나마 껴 있어서,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입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다시 빨아야 하는.

시집을 출판해 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쓴 한 권의 시집은 '다림질까지 한 듯 기막히게 반듯이 개어놓은 시인의 속옷'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시는 대개로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보통 그 시를 적게 된 에피소드나 관찰 경험이 존재한다. 그런 개인적인 것들을 정리해 둔 것이 바로 시집이니 반듯이 개어놓은 속옷이라. 그 속옷에는 슬픔이 있다. 빨아도 사라지지 않는. 그래서인지 나는 시집을 출판하고 나서 한 번도 내 시집을 완독 한 적이 없다. 그저 읽기만 하는 행위라도 도저히 지속하기가 힘든.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속옷은 제대로 입어볼 수 있을까, 나의 슬픔을 제대로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을까. 시를 쓰는 순간 망각의 축복을 맞이할 기회를 잃는 것이 시인이다. 그럼에도 그 슬픔을 남기는 것이다. 세상 모든 시인의 희생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빨다가 갑자기 눈물이 톡 터질 정도로 허무하기가 그 어떤 시적 수사로도 비유할 수 없는.

시인은 삶의 허무와 맞닿아 있다. 슬픔은 허무를 향해 손짓하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그 슬픔을 쓰는 이들이다. 저 허무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 허무를 시인 그 자체라고 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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