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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지하철에서 우리는

도미구이♡



도미구이


도미 한마리를 사왔다. 비늘이 어찌나 단단한지 비늘 제거하느라

팔빠지는줄 알았다. 이래서 가격이 착했나보다.


팔뚝만한 도미의 머리 부분은 매운탕하고

몸통은 칼집내고 올리브유 바른후 레몬 썰어 올려서 오븐에 구웠다.

구운 도미는 유즈쇼유에 찍어 먹는다.


다진마늘, 고추가루, 진간장, 액젖 을 섞어 양념장을 불려둔다.

불린 양념장을 멸치와 황태를 끓여 만든 육수에  넣고  팔팔 끓이다가 도미머리를 넣고 마져 끓인다.

마지막에 콩나물,대파를 넣어 끓여준다.




나는 고기보다 생선을 좋아한다.

고등어, 갈치, 삼치, 이면수, 도미, 꽁치. 삭힌 홍어를 제외하고 모든 생선은 다 좋아한다.

한가지 생선으로 만들수 있는 음식은 매우 다양하다. 굽고, 졸이고, 찌고, 지지고, 튀기고

양념을 심심하게 하면 생선살의 부드러운 맛과 담백한 맛을 고루 만끽할 수가 있다.

그런데 식구들은 고기를 더 좋아하니 대부분 육류요리가 대부분 식탁에 오르는데

이렇게 1년에 한 번 쯤은 내가 참 좋아하는 도미를 조리하여 상에 올린다.


어린시절에 우리집엔 커다란 식탁이 있었지만 엄마는 식사때가 되면 나무로 만든 밥상에 매끼 상을 차리셨다.

그 밥상으로 말할것 같으면 엄마가 친목계 회원들과 함께 남원 어딘가에서 교자상만 만드는 작가에게 부탁하여 만들어 온 것이었는데, 우리 다섯 가족이 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 였다.


매우 커다랗고 나뭇결이 살아 있었으며 표면은 반짝반짝 윤이 났었다. 모여 앉아 밥을 먹으면 반찬이 몇가지 안되어도 반짝이는 밥상에 어리는 모습을 보며 참 맛있게 밥을 먹었고 엄마는 식사후에 어떤 의식처럼 행주

2개를 가져와서 말끔히 닦은 후 곱게 접어 커버를 씌우고 베란다에 세워 두셨다. 그래서 나는 한때 그 밥상이 우리집 상전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시 생선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런 밥상위에 엄마는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선반찬을 올리셨더랬다. 아버지가 생선을 굉장히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생선 조림이나 구이를 하실땐 2마리를 반 씩 잘라 4토막을 만들어서 하셨고. 굴비를 굽는 날은 딱 4마리만 구우셨다. 엄마는 그 고운 밥상위에 우리가 늘어놓은 가시를 치워가며 식사를 하시느라

분주하셨는데, 먹기만 하던 내 눈에 짝수로 올려져 있는 생선들이 들어온 것은 훨씬 시간이 흘러서였다.


우리식구는 5명인데 엄만 왜 늘 4마리만 굽는걸까. 그렇게 엄마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혼을 하고, 나는 회사다니며 살림하며 살던 어느 날. 회사 동료 누군가가 탈의실에서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롯0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에 ( 당시 나의 직장은 명동이었다) 신기한 서비스가 생겼다는 것이다. 지푸라기에 엮여있는 굴비를 깨끗하게 지느러미까지 정리해서 서너마리씩 비닐에 넣어 냉동보관이 쉽도록 포장하여 준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퇴근하자마자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20마리가 엮여있는 굴비 한두름을 샀다.

굴비를 깨끗이 다듬고 비늘 정리까지해서 4마리씩 봉지에 담으니 5봉지가 나왔다.

그때 굴비 한 두름이 만원이었다.


포장을 철저히 했으나 약간은 비릿한 냄새가 풍기는 롯0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내가 간 곳은

2호선 아현역. 엄마를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개찰구를 통과하여 친정집까지 가고 싶었는데 엄마가 한사코 집까지 오지말고 그 곳에서 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개찰구를 가운데 두고 한쪽에 서서 상봉을 하였다.


“ 엄마, 내가 집까지 간다니깐.”

“얘, 뭐하러 지하철 표를 없애. 나도 운동할겸 걷고 이렇게 얼굴보면 되지.”

“엄마, 내가 신기한거 사왔어. 백화점에서 굴비를 이렇게 다듬어서 몇마리씩 봉지에 포장해주더라.”

“그래? 그럼 더 비싼거 아니야? 너랑 김서방이나 먹지.”

“아냐. 엄마, 이거 4마리씩 봉지에 담았으니까 앞으론 반드시 4마리 구워서 엄마도 드셔. 꼭!”

그때 내가 결혼하여 출가한 후 동생 2명이 남아 있어서 4식구였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달려갔지만 엄마는 얼마되지도 않는 지하철표 아끼라고 나를 개찰구를 통과하지 못하게 그 곳에서 만나자 하신거고, 나는 엄마도 부디 굴비를 한마리씩 드셨으면 좋겠어서 그렇게 찾아 갔던 것이었다.


우리는 그날 개찰구를 가운데 두고 서서 거의 30분이 넘도록 수다를 떨었다.

엄마는 이야기 중간에 신랑이 기다린다고 자꾸 집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난 그날 조금만 더 엄마를 보고 싶었다.


28년 전의 일이다.

그날 엄마가 입고 나오셨던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엄마의 헤어스타일이 아직도 선명하다.

산소통을 들이마시듯 엄마손 잡고 실컷 수다떨다 돌아서는 내 뒷모습을 보고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리고 과연 그 이후에 굴비를 4마리씩 구우셨을까?


돌아가실때까지 한번도 나는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여전히 한마리 줄여

3마리를 구우셨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도 굴비를 구울때는

아현역 개찰구가 떠오르고

슬리퍼만 끌고 나오셨던

뽀얀 얼굴의 고왔던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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