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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당 빵이면 족한 여자

결혼은 파뿌리도 사랑하는 일♡



1994년 4월 9일 토요일 오후 2시.

그 날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내가 바로 아줌마가 되던 날.


그해 봄은 여름처럼 무척 더웠던 해였다.

앙카라 공원에서 웨딩사진을 찍으면서 땀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서 참 사진들이 곱게 나왔었다.


아버님 소개로 만나 6개월도 채 안된

 연애같지 않은 연애를 마치고 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는 성경말씀으로 시작된 결혼예배였다.

그날의 그 말씀을 단 하루도 나는 잊어본 적이 없다.

나를 두고 울타리 둘러진 나의 가족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함이 없었다.


교회에서 치뤄진 예식이라서 교회 옆 어느 한식당에서 하객들의 식사를 준비했었는데

식이 끝나고 보니  식사값이 예상보다 너무 너무 많이 나왔다.

알고보니 그 날 교회에서 우리가 결혼식을 마치고 뒤이어 S 그룹 또 한명의  예식이  있었나보다.   S전자 직원 두명이  같은 날 결혼을 한 것이다.

신랑 이름도 우리남편 이름과 비슷하여 두 집의 하객들이 뒤섞여서 그런 일이 생겼던 것이다.


정신없이 그 사건을 마무리 짓고 메이크업도 못 지워서 속눈썹은 까맣게 붙은 채로,

올림머리도 그대로,  뒤풀이 복장 그대로 (빨간 투피스) 공항으로 정신없이 갔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청바지로 갈아입었는데 머리와 화장은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하고 비행기를 탔었다.

그렇게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하와이까지 가는동안 내리 잠만 잤던 기억이 난다.

비행기 안에서 올림머리를 풀어헤치려고 수십개의 핀을  뽑다가 망쳐서 어정쩡한 모양으로 징징거렸던 기억도 난다.

그랬던 결혼기념일이 지난 토요일.

홍매화를 보겠다고  창덕궁에 갔다.

그런데 홍매화가 아직 절정에 이르질 못한 모양이다.

꽃은 풍성하지 못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고궁을 걷는 일은 참 좋았다.

우리가 나오는 시간에 관광객들이 물밀듯이 밀려와 겁이나서 빠져 나왔다.


아이들이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난 사실 결혼기념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은 나의 결혼기념일을 참 열심히 챙겨준다.  그건 고마운 일인것 같다.


차를 마시려고 남편과 마주 앉았는데 최강동안 김선생께서 염색을 안했더니 모습이 낯설다.

염색약이 건강에 안좋을것 같아서 내가 염색을 못하게 한다.

내손보다 더 고운 두 손으로 열심히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 남편과 결혼식날 남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난 남편의 지금의 모습이 더 좋다.


언젠가 대파를 다듬다가 파뿌리를 자세히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라는 주례말씀도 생각이 났다.

보기 참 흉한 파뿌리다.

갈래 갈래 건조하게 늘어진 누런 뿌리와 사이 사이 뒤엉킨 흙가루가 우리 인생일 것이다.

머리가 그렇게 되어도 사랑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은 그저 의례적인 말씀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남들이 필요없다고 버리고 눈길도 주지 않는 파뿌리가 되더라도 부부는 서로 바라보며 이쁘다고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널 보듬어줄게… 라는 마음이어야 함도 알겠다……..


살면서 왜 밉고 얄미운 적이 없겠냐마는

이해하고  보듬어 주는 커다란 아량으로 다 극복하고 사랑하며 살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한 30년쯤은 더 노력하려고 한다.

나에겐 30년이지만 나보다 5살 많은 남편에겐 25년쯤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짠하고 슬퍼진다.

어찌보면 나보다 남편이 더 노력할지도 모른다.

그런게 부부인가보다.


오는 길에 문득 태극당이 떠올랐다.

이미 한남대교쪽으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남편이 " 태극당 가고 싶어?" 하더니 핸들을

돌려준다.

내가 속이 없는지 모르지만 난 이럴때

좀 감동을 하는 아줌마다.

내가 태극당 가자고 하지 않아도

꽉 막히는 도로를 뚫고 자진해서 태극당에

나를 짠하고 데려다 줄때.!

내가 좋아하는 옛날 롤케잌( 요즘 롤케잌은 하얀 생크림이 들어 있어서 싫다.) 을 껴안고

돌아왔다.


암튼 끝내주게 화창한 날에 결혼한 덕분에

매년 나의 4월 9일은 화창하다.

앞으로도 잘 살아 봅시다!


https://youtu.be/vbbh_s5z2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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