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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산책

하마터면 놓칠 뻔


론강 하류에 위치한 아비뇽은 교통의 요지이자

문화의 도시이고 교황청이 남아있다.

우리는 ' 아비뇽 유수'를 기억한다.


아비뇽 유수는 14세기 로마에 위치해 있던 교황청을 신성로마제국이 강제로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 교황이 70년 동안 머무르게 한 사건이다.

이 시기에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했다.

'유수'란 잡아가둔다는 의미인데 말 그대로

교황이 아비뇽에 유배되었음을 말한다.

결국 교황이 로마로 돌아갔으나 이로써 프랑스 왕은 가톡리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

그래서 교구 내에서 걷히는 헌금도 교황청으로 흘러가지 못했고, 성직자 임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대도시 아비뇽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도시이다. 성벽 안쪽에 모든 관광지가 모여있다. 시에서 운영하는 펠로포( velopop)

라는 자전거  공유시스템이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비뇽 성안으로 들어가려면 성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에는  공영 주차장이 넓어서 주차가 힘들지는 않았고 주차장  이용자는 화장실도 무료이용이 가능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주차할때  화장실이용이

가능한 곳인지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안시에서 많이 추워져서 겨울 패딩을 하나씩

사 입었는데 아비뇽에 도착하니  너무 덥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지하에 주차하고 올라와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교황청이었다.

아비뇽 대성당 옆에  있는 교황청은 베네딕트 12세와 클레멍 6세에 걸친 20년간 건설되었다.

14세기 교황이 머물렀던 곳이자 방어시설로 건축된 유럽 최대 고딕양식 궁전이다.

높은 탑과 두꺼운 벽으로 보호된 교황청은

성당 4개를 합친 규모라고 한다.

교황청 내부는 천장이 높고 웅장한 시설들이

가톡릭 성당의 부와 권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교황이 아비뇽에서 떠난 후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프레스코화들이 전시되었다.

언덕을 올라 외관을 처음 보았을 때는 교황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는데 교황청

내부의 화려한 프레스코화들을 보니 그 당시

화려함과 부의 축적이 짐작되기도 하였다.


교황청 옆에 있는 아비뇽 대성당은 12세기 중반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다.

종탑 위의 황금 성모상이 햇빛에 반짝여서

눈이 부셔서 올려다보기가 어려웠다.

하늘에 가까이 더 가까이 저렇게 높은 곳에

황금으로 성모상을 만들자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을까.

목이 꺾일듯 올려다 보며  아름답지만 마음아픈

장면이었다.

내부에는 많은 예술작품들과 교황의 묘도 안치가 되어 있었다,

아비뇽대성당은 크게 부흥했었지만 옆에 세워진

교황청과 비교되기 시작했다.

교황청에 밀리지 않으려고 계속 공사를 하면서

둥근 지붕, 성모마리아상 등을 추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교황청광장에서 언덕을 올라 대성당으로 오르면

예수상이 보인다. 갑자기 마음이 요동쳤다.

잠시 휘청거렸다. 그리고 성경의 한 구

불현듯 떠올랐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잊고 있었다. 십자가를 올려다보는데 현기증이 났다.  지나치려 했던 아비뇽을 찾아가게 하신

그분의 뜻을 알겠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졌었다.



알프스에서 지중해로 유유히 흐르는 론강 위에

세계 문화유산인 베네 제 다리가 있다.

아비뇽다리라고도 하는데 베네제라는 양치기 소년이 아비뇽에 다리를 놓으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혼자 돌을 쌓아 이 다리를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이 다리가 세워진 후 아비뇽은 더욱 발전했고

구시가지 개발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아비뇽과 빌 브레 자비용을 연결했던 이 다리는  22개의 아치가 있었지만 대홍수로

무너지고 4개의 아치만 남은 끊어진 다리이다.

< 아비뇽 다리 위에서>라는 노래로도 유명하다.


" 아비뇽 다리 위에서 손을 마주 잡고 즐겁게

춤추자 둥글게 동그라미 그리며 친구들은 인사해요 멋쟁이 친구들은 이렇게 인사해요"


두 지역을 연결하면서 물자의 왕래에 큰 역할을 했겠지만 폭이 넓고 대단히 긴 아비뇽 다리 위에서는 모여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광장의 역할도 했던 듯싶다.

끊어진 다리를 왜 다시 보수공사를 하지 않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매우 뜨겁고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더운 날이었다.

목이 타서 아주 비싼 생수를 사서 들이켰었다.

그런 날인데 광장 가운데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트럼펫으로 < lover's concerto >를 연주하셨다.   열심히 따라 부르는 나와 가끔 눈이 마주치면 눈을 찡긋해 주셨다.

하늘은 지치도록 푸르고  새 한 마리 날아가지 않는 무결점의 하늘이었다.

오랜 역사와 함께 한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키가 크고 이파리가 무성한 나무들이 곳곳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가끔 가느다란 희망처럼 불어주는 바람마저도

더웠지만 그래도 결딜수 있었고

골목을 걷다가 만나는 오래된 건물들의

이끼 낀 벽을 보며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낸 도시인지 알 수가 있었다.



아비뇽을 걷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작은 도시였다.

안시에서 아를로 가던 중 아비뇽 이정표가 보였을 때 잠시 고민했었다. 안시만큼이나 기대를 많이 한 곳이 아를이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여 짐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현듯 아비뇽 유수가 떠올랐다. 교황들이 왕권에 밀려 유배되었던 역사적인 그 장소를  모른척할 수가 없어서

별 기대 없이 들른 곳이었다.

론강이 있지만  온통 건축물 색이 대리석이나 모래빛이어서인지 나의 첫 느낌은 매우 마르고 건조한 도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가지 않았더라면 후회했을 것 같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모든 곳에는 그곳이  생겨난 역사가 있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글로 읽고 책으로 배운 것들을 직접 보는 일은

오래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어서 또 다른 기쁨을 주는 것 같다.

차를 타니 에어컨이 시원해서 노곤해졌다.

아를은 어떤 곳일까 상상하며  땀을 훔쳤다.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그냥 하자!

아비뇽은 그렇게 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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