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의 기쁨과 슬픔
고립되고 싶었다. 최대한 조용한 곳으로 숨고 싶었다. 특정 사건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게 버겁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진실한 관계성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할머니와 부모님이 있는 본가에 매 주말마다 왕복 세 시간씩 방문하는 일에 조금 지쳤다. 그들이 보고싶어서 간다기 보다, 할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간다의 마음 반,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는 고부, 부부 관계 사이 적막함을 나만이 깰 수 있다 생각해서 책임감이 반이었다. 삼 년 정도 되니 집에 가는 게 쉬러가는 게 아니라 일로 느껴졌다.
때로는 SNS에서 취향과 관심사가 비슷해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오프라인으로 만나 이들과 관계를 유지하면 내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게 정말 의미있는 만남인가?’ 싶었다. 남자친구와의 사이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오래된 사이라 그런지 하루에 한두번 형식적으로 안부만 주고 받으니 형식적인 사이가 된 것은 아닌가 가끔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관계 속에 진짜 나의 모습대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도리어 외로움을 느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다 끊어 내고 온전히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오래 떠날 수는 없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휴가를 길게 쓸 수도 없고, 주말 일정이 있는지라 금요일 하루만 연차를 내고 이틀 일정으로 고립 여정을 떠나기로 했다. 행선지는 혼자 여행을 떠날 때 주로 가는 제주 해안도, 도심 속 호텔도 아닌 절이었다.
불교 신도는 아니지만 절은 좋아한다. 절은 주로 산에 숨어 있고, 고요하고,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생경한 풍경 속에 파묻혀 있으면 환기도 되고 생각 정리도 될 것 같아서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템플스테이는 한국의 불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준비된 프로그램은 있지만 강제성은 없는 휴식형과 108배 하며 염주 꿰기, 불교 미술의 만다라 색칠 등 불교에 관해 알아가는 체험형으로 나뉜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저 조용히 머물고, 마음을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휴식형을 택했다. 고민 끝에 충북 보은 속리산의 법주사로 향했다.
여행 날 아침, 가장 편안한 옷을 입었다. 내 몸에 길들여져 어색함이 없고, 뱃살이 드러날까 봐 배에 힘을 꽉 주지 않아도 되는 옷 말이다. 소매가 닳았지만 아직 입을 만한 남색 후드티와 청바지에 검은 스니커즈를 신었다. 터미널에서 속리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고, 차창 밖으로 울긋불긋하지만 아직 완전히 옷을 갈아 입지는 않은 산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여행의 기분을 끌어올리고 싶어 귀에 꼽은 이어폰에서는 적당히 들뜬 통기타 선율이 흘러나왔다.
음악 앱에서 노래를 고르고, 날씨를 확인하고, 무의식적으로 SNS 피드를 넘기다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 고립이라면, 핸드폰을 멀리하는 게 1순위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모든 앱의 알림을 껐다. 읽지 않으면 동그란 빨간 딱지가 앱 아이콘 상단에 뜨는 데 이 또한 보이지 않게 설정했다. 빨간 딱지가 보이면 조건반사처럼 앱을 누를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채팅 방에서 ‘ㅋ’를 여러 개 붙여가며 가십거리를 나누는 불필요한 시간도 피하고 싶었다.
세 시간 반을 달려 속리산에 도착했다. 스님의 합장 인사로 나의 첫 템플스테이는 시작되었다. 방을 안내 받고, 템플스테이의 상징 같은 수련복으로 갈아입었다. 위에는 노란 조끼, 밑에는 다리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통이 넉너하지만 발목 아래가 좁은 갈색 바지였다. 물빠진 은행나무 같았다.
수련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당을 서성거렸다. 한국인은 열 명, 외국인도 다섯 명 정도였다. 휴식형이면 단연 사람들과 만나지 않거나 아니면 그 수라도 적을 줄 알았는데 참가자가 생각보다 많아서 당황했다. 템플 스테이가 아니라 패키지 투어의 현장 같았다. 연세 지긋한 할머니 불교 신자 삼인방부터, 모자 사이 참가자, 혼자 온 여성까지 구성도 다양했다. 집결지에 모인 한국인 참가자들은 인솔자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절이라 문화재 해설을 듣는 시간, 저녁 식사, 기도를 드리는 예불, 자유시간 후 취침으로 첫날이 끝난다. 다음 날 새벽 네 시에 아침 예불, 아침 식사, 등산, 점심을 먹고 퇴소하는 스케쥴이었다. 생각보다 빡빡한 일정이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방구석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건 아니다 싶었다. ‘조용히 있으면 아무도 안 건드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아침 예불을 제외한 모든 일정에 참여하기로 했다.
일정이 꽉 찬 만큼 핸드폰도 잘 안만질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6,7 층 짜리 아파트 높이 만한 금동 불상이 놀라워서 찰칵, 해질녘 단풍이 물든 산과 오랜 목탑이 멋있어서 찰칵. 저녁에 나온 시래기 된장국, 두부조림, 시금치 나물, 시루떡을 큰 접시에 담아 처음 먹는 절밥을 기념해 사진을 찍었다. 공양간이라 불리는 식사 공간 벽에는 중간중간 ‘묵언’이라 쓰여 있었다. 오물오물 씹는 소리만 간간히 들렸다. 이 모든 낯선 풍경이 재밌어서 남자친구에게 실시간으로 사진을 보냈다. 평소에는 출근 전, 자기 전에 인사만 간단히 나누고, 일과 중에는 연락을 안하는데, 고립되고 싶다던 나는 신이 나서 시시콜콜 남자친구에게 소식을 전했다.
밥을 다 먹고나니 저녁 예불 시간이 다 되었다. 대웅전에 들어가기 전에 스님들의 의식을 구경했다. 보신각에서 본 듯한 종을 치고, 큰 북을 두드리는 등 스님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시간이었다. “사물 의식을 보고 절에 들어가겠습니다. 의식 중에 핸드폰 촬영은 되지만, 기도하는 예불 시간에는 무음으로 핸드폰을 설정해 주세요.” 둥둥둥둥 산속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어를 할 줄 알아서 초반에 외국인들을 안내한 스님이 북을 치러 가시는 바람에 나이 지긋한 한국인 인솔자 선생님이 외국인들까지 케어해야 했다. 선생님이 핸드폰 번역 앱을 켜서 입을 가까이 대고 연거푸 말해봐도 앱은 알아듣지 못했다. 집중하려던 찰나 들려온 선생님의 한 마디. “안명온님, 통역 좀 해주세요.” 처음에는 못들은 척 하고 넘기려 했다. 영어로 말하면 주목 받을 것 같고 모든 게 귀찮았다. 선생님의 부추김에 못이겨 입을 열었다. 내 영어 실력이 부끄러워 혼자 씁쓸해 했지만, 벨기에인들이 ‘오케이’라 답해줘서 다행이었다. 대웅전에 들어가 목탁 소리에 맞춰 인솔자 선생님의 절 타이밍에 따라 절을 몇 번 하니 예불이 끝났다. 대웅전을 나와 깜깜한 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별들이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둘째 날에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산에 올랐다. 인솔자 선생님은 산행 중에 나한테 자연스럽게 통역을 맡겼다. 이제 삼분의 일 정도 남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데, 도통 생각이 안났다. 뒤따라오는 벨기에인에게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불어로 '힘내!'라는 말을 전했다. 좀 더 길게 말하고 싶었는데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했음에도 불어 실력이 별로인 사실이 조금 슬펐다. 내 말을 직접 들은 분이 뒤에 서 있는 친구들에게 '힘내!'라고 말했다. 줄줄이 올라오던 그들은 서로 바톤을 넘기듯 ‘힘내’라는 말을 연이어 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한국인 참가자들은 흐뭇한 눈빛을 지어 보였다. 정상에서 명상도 하고 간식도 먹고 하산하니 프로그램은 끝났다.
서울행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나섰다. 혼자 씩씩하게 찾아온 게 기특하다며 말을 거신 할머니가 계셨는데, 가려던 나를 붙잡고 소금사탕 두 개를 손에 쥐어 주셨다. "서울 올라가면서 심심할 때 먹어봐. 달콤하고 짭짤해서 맛이 좋아."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사탕을 입 안에 굴렸다. 터미널로 향하는 길에 지역 특산물인 사과대추 장이 열렸다. 엄마가 좋아하는 대추였다. 한 봉지를 사서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연결되고 싶지 않아서 떠났던 여행이건만, 오히려 더 많이 사람들과 이어져 있었다. 아는 사람,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의 고립은 성공했지만, 오히려 생생한 연결을 통해 치유 받았다. 가까운 타인을 대하면서 느꼈던 부담이나 공허함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내가 줘야할 것, 얻으려는 것 없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말 한마디 나누는 게 좋았다. 남자친구에게 더 많이 연락하며 안부를 전하고, 가족이 좋아하는 과일을 떠올렸다.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통역해가며 에너지를 쏟는 걸 보니 놀라웠다. 고립이냐 연결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여유였다. 그동안 너무 빡빡한 일정을 계획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사람들과 만나고 에너지를 소진해왔다. 혼자 쉴 시간도 없는데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나가는 게 일로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지켜내고 싶은 모든 것을 손에 꽉 쥐고 있으니 나를 돌볼 틈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관계성에 의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잘 대할 여유도 없었던 거다. 템플 스테이에서 나 자신을 돌보니 그제서야 남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속세에서 벗어났다 돌아오니 사람을 대할 때 억지로 애쓰지 않았다. 그저 내 마음가는 대로 표현하니 한결 편해졌다. 절에서의 고립은 결국 나로 향한 연결이자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마음 정돈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