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말 거는 사람

반짝이는 트리의 계절에는

by 베리티

벽걸이 트리가 반짝인다. 아침 7시, 아직 어스름하니 새벽 같은 아침이다. 밤의 계절로 향하는 중이다. 동지가 다가오고, 낮이 짧아지니 시간 감각도 달라진다. 아침에 반짝이는 빛을 보는 건 낯설지만 다른 계절과 다른 포근함이 느껴진다. 깜빡이는 불빛에는 약간의 마법이 깃들어있는 것 같다. 컵에 물을 따르고, 창 너머 멀리 동이 터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붙어있다가 한숨 돌리고 나니 금세 어두워졌다. 오늘 저녁은 혼자인데, 뭘 먹으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집 근처 수제버거를 포장하기로 했다. 매장에서 직접 빵도 굽고, 두툼한 패티를 올리는 모습을 모고 한 번쯤 먹어봐야지 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분리수거할 박스들을 한가득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같은 동의 누군가가 따라서 내려온다. 박스를 내려놓고 보니,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1층 사람이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눈가에 약간의 스모키 화장을 한 30대 여성. 복도를 오가며 스치듯 인사를 나눈 게 전부여서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다.

그 집 부부가 가까이에서 와인숍을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작은 마당이 있는 오래된 집을 개조하여 프랑스 농가 풍으로 꾸민 그 가게는 인스타 핫플이 되었다.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여러 사람들을 지나친다. 그 작은 마당에서는 저녁이면 가끔씩 파티가 열렸다. 추석 연휴처럼 조금 느슨해질 수 있는 시간에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들이 보였다. 북토크를 알리는 전단지가 벽에 붙기도 했다. 가까우니 한번 가볼까 했었지만 언제나 늘 예약마감이었다. 그런데 혹시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윗집 강아지가 많이 울어요."

내가 다가가니 그녀가 말했다. 아마도 나를 2층 사람인 줄 알았나 보다. 강아지 소리가 시끄러워서 그러는 건가.

"우리 집은 강아지를 안 키우는데요?"

"아... 아니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차렸다.

"강아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죠?"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2층에도 젊은 부부가 사는데, 어땠더라? 늘 급히 인사를 주고받으며 다니니 뭐 떠오르는 건 없다.

"그럼 몇 층 사세요?"

나는 위를 올려다보며 우리 집의 창가쪽을 가리켰다.

"우리 집은 저어기~ 4층이에요."


같이 그 위를 올려보다가, 문득 아이들끼리 너 어디 살어? 묻는 것 같아서 픽 웃음이 났다.

이제 슬슬 발길을 돌린다.

"와인샵 하시는... 맞죠?"

"네" 1층사람은 고개를 끄덕인다.

"가게가 예뻐요"

그러자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놀러오세요!"

그러다 길이 엇갈린다. "네, 놀러갈게요"

1층 사람은 와인숍으로 나는 수제버거집으로 갈 길을 간다.


치즈가 적당히 녹아있는 따뜻한 수제버거를 베어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보니 우리 아랫집도 좀 궁금하기는 했다. 어떤 아침에는 바흐를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오디오 소리는 아니고, 연주다. 그 소리를 들을 때면 누굴까 궁금해지는데, 역시 얼굴도 잘 모른다. 선글라스를 즐겨쓰는 퍼머 머리 여성분인 건 맞다. 이웃에 산다해도 처음 말을 건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다들 바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실례가 안 되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주어서 스몰톡을 거치고 나니 더 따뜻한 저녁이 되었다.


언젠가 김하나 작가의 책에서 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여행지에서 2층 버스를 탔는데, 그 많은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옆자리에 턱 앉는 사람이 있었다. 물론 처음보는 사람이었지만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다고 했다.

그는 2층 버스 맨 앞자리야말로 홍콩 여행의 백미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 자리에서 이국적 네온 간판과 거리를 바라보는 풍경이 장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침사추이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알려주었다. 심지어 자신의 목적지보다 한 정류장 더 빨리 내려서 자신만의 명소를 알려주고 사라졌다. 작가는 여행 내내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적었다.


"내가 먼저 상대에게 매너를 갖추어 말을 걸면 상대 또한 잠시나마 자신의 세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말하기를 말하기> 중에서, 김하나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여수에 갔을 때였다. 호텔에서 나오는 탕류의 한식이 조금 질려서 떡볶이가 먹고 싶어 일행과 떨어져 혼자 동네 산책을 나왔다. 근처에 작은 분식집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바에 앉아 오뎅국물을 후후 불며 마시다가, 주인에게 슬쩍 주변 맛집을 물어보았다. 그 주인분은 신이 나서 음식 취향을 물어보면서 맞춤형 정보를 아낌없이 내놓았고 동선과 코스까지메모지에 적어주셨다.

"다들 여수에 오면 게장 먹지만 여수 사람들은 게장 잘 안 먹어요, 여기 시장에 가면 아주 오래된 코다리집이 있는데..."

덕분에 로컬 스타일 여행을 제대로 했다. 토박이들이 가는 코다리집도 가고, 관광지 느낌 안 나는 동네도 돌아다녔다. 여객선 터미널 근처의 백반집 그리고 신선한 건어물이 있는 수산시장의 가게까지 알게 되었다. 무민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그 3장의 메모지를 다이어리에 잘 붙여두었다.


다들 바쁜 일상 속에 먼저 말 거는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밤이 깊어지는 계절, 트리의 반짝이는 불빛에 의지해서 조금 용기를 내볼 수 있다.

2층의 강아지가 외롭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3층 피아노 연주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언젠가 와인샵에서 다음 대화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 숨기고 있던 자신의 세계를 반짝 보여줄 수 있는 순간, 혹시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그렇게 시작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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