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 스미스의 <저스트 키즈>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인 피난처 같은 곳이었죠."
'90년대 홍대 근처에 하나둘 클럽이 막 생기기 시작할 때 간판이 가관이었다. 발전소. 황금투구. 곰팡이. 상수도. 명월관 등 등. 따로 설명도 없어서 간판만 봐서는 뭐 하는 장소인지 알 수 없다. 조금 으스스하고 여기 약 같은 거 하는데 아냐? 의심스럽기도 하고 음습한 계단 아래에선 향 냄새도 났다. 호기심이 많던 어린 시절이라 눈 한번 딱 감고 들어가 보니 눈이 커진다.
그곳은 미술 하는 사람들이 작업하며 오가다 만든 장삿속을 챙기거나 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음악 소리는 컸고 널찍한 플로어에 드문 드문 의자들. 현란한 클럽의 블링블링 인테리어가 아니라, 작업실 같은 공간에 대충 사이키 조명을 걸고, 취향껏 물건을 갖다 놓고 주로 미술 하는 지인들이 드나들었다.
오디오만큼은 하이엔드여서 음악을 틀면 쿵쿵 바닥이 울렸고 그런 음악에 춤도 추나 싶은데 누군가 플로어에 서면 어디서도 보지 못한 춤이 펼쳐졌다. 그런 춤을 한번 보고 나면 아무리 화려해도 칼군무 같은 것은 시시해진다. 무국적의 막춤이지만, 그때 그 음악에 딱 맞춤인 한 번뿐인 다시없을 춤. 시킨 적도 없는데 빈 플로어에 혼자서 스르르 나갈 정도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 미친 척 그러고 있어도 각자 자기 할 일 하고 있는 사람들도 신기했다. 같이 간 친구와 나만 빼고 다들 지인들인 것 같았다.
몇 년 전 그 공간들을 추억하는 전시를 회고하며 어느 미술가가 한 말이다. 피난처.
지금의 홍대 앞은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이미 그런 공간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젠트리피케이션도 관광객도 아직 발들이기 훨씬 전, 아주 오래된 얘기다. 예술가들의 피난처라고 하면, 뉴욕의 첼시호텔이 늘 떠오른다.
6~70년대 미국 뉴욕의 펑크씬의 대모가 된 패티 스미스는 젊은 시절 가진 것이 없었다. 방세도 없어서 여기저기 전전하던 때, 누군가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다. '모르핀 천사아저씨가 여차 하면 첼시호텔에 가보라고 했다. 작품을 저당 잡히면 방을 구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후에 사진작가가 될 당시 남자친구 로버트 메이플소스와 함께 그곳으로 향한다.
밥 딜런, 레너드 코헨, 탐 웨이츠, 제니스 조플린, 이기팝 같은 음악가들부터 마크 트웨인, 아서 밀러, 토마스 울프 등 작가들, 앤디 워홀 등 미술가들이 살면서 작업을 했던 호텔. 그곳에 예술가들이 모여든 이유는 호텔의 독특한 운영 방식에 있었다. 패티 스미스에게 그 아저씨가 알려준 것처럼 창작물을 숙박비 대신 맡길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창작과 생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그곳은 더 바랄 것 없는 피난처였다.
좁은 우리 방보다 넓어서 좋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들어오든 한 번 흘깃 보고 말지, 주목받지 않았기 때문에 익명성이 보장됐다.
첼시호텔은 100 개의 방이 모여 있지만, 그 각각이 하나의 소우주인 환상지대 속의 인형의 집 같은 묘한 공간이었다. 난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그들의 생각과 영혼을 만나보려 애썼다.
모두가 나름대로 비범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지만, 부자는 없었다. 성공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들도 흥청
망청 술을 마실 여유가 다였다. 낡지만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첼시 호텔이 나는 정말 좋았다.
-<저스트 키즈> 중에서, 패티 스미스
첼시호텔은 워낙 유명해서 유튜브 검색만 해봐도 수많은 자료가 있다. 각자의 작은 방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있어서 똑같은 방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기괴하고도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친구들과 실컷 떠들고 나서 각자 집으로 흩어져야 하는 아쉬움이 없었다. 밤새도록 작품의 이야기를 떠들 수 있고, 옆방을 방문하거나 머물 수 있었으니, 공식적이지는 않아도 작가들의 레지던시였던 셈이다. 6,70년대의 뉴욕은 그런 곳이었다. 내 친구 하나는 이따금씩 '골든 에이지'로 그 시절을 꼽으며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타임슬립이 가능하다면 그곳을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재밌게도 '미드 나잇 인 파리'를 만든 우디 앨런은 뉴욕 출신이다)
첼시 호텔은 내 집이고, 엘 키호테는 내 바였다... 그 당시엔 내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시 몇 편 때문에 끙끙대는, 스물두 살의 멀대 같은 서점 직원이었을 뿐이다...(중략)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패티 스미스의 중성적인 스타일에 매혹되었다. 남자친구 로버트가 찍어준 앨범 커버로 남아있는 유명한 사진. 그 스타일 역시 첼시호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롤링스톤즈의 키스 리처드 스타일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패티 스미스가 되었다.
요즘에도 헤어 스타일 하나로 갑자기 확 떠오르는 연예인들이 있지 않은가. 패티 스미스는 '헤어스타일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격상되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내면의 자신을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패티 스미스는 유명한 바를 드나든다. 그 헤어스타일로 빛나고 있었고 스타가 먼저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남부의 노래> 스타일 밀짚모자에 브러 래빗 재킷, 워크 부츠에 페그드 팬츠 차림으로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독특하지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뭐 하고 있어?"
나는 고개를 들어 까만 선글라스를 쓴 낯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글 쓰고 있어요."
"시인이야?"
"아마도요, "
나는 관심 없는 척, 그를 못 알아본 척하며 자리를 바꿔 앉았지만, 늘어지는 목소리와 어두운 미소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내가 지금 누굴 대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돈 룩 백>의 바로 그 사나이, 밥 딜런 말고 다른 그 사람, 평화주의자이자 선동가, 밥 딜런의 또 다른 자아인 바비 뉴워스였다. 그는 화가에 싱어송라이터이자 모험가였다. 바비는 내 바로 전 세대 위대한 뮤지션이나 사상가들에게 신뢰받는 동료였다. 내가 얼마나 영광스러워하는지 들키지 않으려고 그냥 일어나서 인사 없이 고개만 까딱하고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헤이, 그렇게 걷는 건 어디서 배웠어?" 내가 대답했다.
"<돈룩백>에서요."
-<저스트 키즈> 중에서, 패티 스미스
자신이 선망하는 스타를 마주치면 너무 굳어서 실수하기 쉽다. 밴드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 마저 폴 매카트니를 딱 마주쳤을 때 자신이 던진 말을 생각하며 이불킥을 했던 경험을 들려준 적이 있다. 어떤 드라마 제목을 대며 그 드라마 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패티 스미스는 당시 노바디였지만, 스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멋지게 응수한다.
그렇게 친구의 일기처럼 읽던 책의 주인공을 공연으로 만나는 것은 설레는 일이었다. 그 시절의 젊음은 지나갔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에너지와 어떤 빛이 그 사람을 감돌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패티 스미스의 공연을 보는 것은 '60년대 뉴욕의 펑크신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한 여름의 땡볕 속에서 스카프를 두른 마이크를 들고 열창을 하는 무대에 환호하며 끝을 아쉬워하고 있을 무렵 옆에서 공연을 보던 외국인이 사진을 같이 찍자고 말을 걸어왔다. 그 역시도 이 순간의 의미를 알고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그 현장의 한 컷을 남겼다.
첼시호텔에 머물렀던 모든 순간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패티 스미스는 그곳 사람들과 장소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회고한다.
언젠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작 우리는 약간 후회만 하고선 어떤 기억을 서랍 속에 넣고 영원히 묻어버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오래된 손수건 속에 넣어 고이 간직해 둔 조개껍질이나, 의미 있는 돌멩이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어느 오후 행복했던 한때를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저스트 키즈> 중에서, 패티 스미스
Patti Smith - Because the Night
https://www.youtube.com/watch?v=x_ksSEONVy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