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그 카페의 냅킨에는 덥수룩한 수염으로 덮인 이리같은 사내가 있다.
누구나 좋은 카페를 알아보는 시그널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생화가 있는 꽃병이라든가, 정성스러운 드리핑이라든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악을 틀어준다든가,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봐줄 만한 화장실.
냅킨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다. 하지만 팬시 하지도 않고 좀 으스스해 보이는 이리 한 마리가 이토록 길게 인상을 남길 줄은 몰랐다. 카페를 만든 사람들은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떠올린 것이다. 여전히 삶을 헤매고 있는 '이리'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를 바랐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해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작은 공연이나 전시, 시낭송 모임이 있고 또 혼자 작업을 하고 싶은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어서 이사도 하고, 올라간 월세를 감당하느라 고비를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는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있어도 몇 시간이고 앉아있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미안해서 뭐라도 더 시켜지고 싶어 진다.
어째서 병적인 인물들에게 이끌리는지 알 수가 없다. 자아분열에 이를 정도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며 글을 쓴 사람들의 수기 같은 기록들. 이 책을 읽고 있다고 말을 꺼내기가 선뜻 내키지는 않아도 온라인 아이디나, 일기, 포스팅에 어쩔 수 없이 드러낼 수밖에 없는 책들 말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그리고 헤세의 <황야의 이리>. 젊은 날에 실컷 헤매게 되는 정체성 탐색의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장소인지 모른다.
'미친 사람들만 볼 것'.
이보다 강렬한 광고가 있을까. 그래서 독자들은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과연 나도 그 미친 사람에 해당하는지 알고 싶어 진다. 정상 판별을 받고 싶은 것인지, 미친 사람 끝판왕이 되고 싶은 것인지 진짜 속내는 모르겠다. 하지만 거부할 수가 없다. <황야의 이리>에 등장하는 미친 인간 할러의 첫인상은 방을 구하기 위해 갑자기 들이닥치며 건넨 한 마디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첫 대면에서 그가 나에게 준 야릇하고 아주 모순적인 인상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유리문에 달려있는 종을 잡아당기고 그 문을 통해 들어왔고, 아주머니는 어둠침침한 복도에 서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 황야의 이리는, 아주머니 말에는 대꾸도 않고 자기 이름조차 말하지 않은 채, 짧게 쳐올린 뽀족한 머리를 탐색하듯이 공중으로 쳐들고 신경질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이리저리 냄새를 맡고는, '아, 여긴 냄새가 참 좋은데요.'라고 말하면서 빙긋이 웃었다. 사람 좋은 아주머니도 덩달아 웃었지만 나는 이 인사말이 아무래도 어색하다고 생각했고, 왠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을 구하러 와서 대뜸 '여긴 냄새가 좋은데요'라고 어색한 인사를 하는 남자. 어딘가 엇박자로 절뚝거리는 대화지만 마냥 싫어할 수만은, 아니 점점 더 호기심이 가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유창하고 화려한 매너로 대화를 건네와도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할러는 어색하지만 호기심이 가는 쪽이었고 관찰해 본 결과 오히려 점점 더 끌리게 된다. 할러가 말한 '좋은 냄새'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할러의 정체를 따라가다 보니, 그는 고통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니체의 표현 대로라면 '고통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 괴팍한 사내는 그저 도시의 좁다란 방을 얻어 그곳에 처박혀서 사회에 기여하는 시민으로서의 생산적인 일들은 뒤로 한 채, 책이나 읽고 술병이나 비우면서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불규칙한 생활을 해나간다. 그의 사회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읽을수록 빠져든다.
말해진 적 없는 고민. 하지만 한 번쯤은 이렇게 살면 정말 안 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완전히 뿌리친 사람은!... 물론 건강한 시민이겠지만 말이다.
할러는 도서관에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한 교수와 마주친다. 교수가 다정하게 구는 바람에 할러는 그의 초대를 뿌리치지 못한다. 교수의 친절함을 받아주느라 너무 열심히 말하고 웃어서 턱에 통증이 올 정도였지만 존경과 우정을 즐기고도 싶은 한 편, 자신의 가식에 피곤해하면서도 결국 약속에 응하게 된 것이다. 사회적 연극을 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아찔할 지경이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지금 옷을 입고 나가서 교수를 방문하고 그와 다소간 꾸며낸 점잖은 말들을 주고받으면서 본래 원치도 않은 이 모든 것들을 하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매시간 원치도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 사는 것이다. 사람들을 방문하고, 오락을 하고, 업무시간에 앉아 있는 것이고, 이 모든 것을 하기 싫은데도, 마지못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다...
아아! 그들이 옳다. 언제나 옳다. 궤도를 이탈한 나처럼, 사람을 울적하게 하는 이 기계적인 운동에 저항하다 절망하여 공허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꿉놀이를 하고 나름의 중요한 일들을 좇았다니며,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이다. 내가 이 수기에서 이따금 사람들을 경멸하고 비웃는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을 고발하고, 내 개인적인 고통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려 한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어느 모로 보나, 가는 것이 훌륭한 사회인이라는 증거가 되는 약속이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불편해질 때가 있다. 가서 그들을 만나 자연스럽고 사교적인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여지는 선택이 얼마나 많았던가. 인간사의 여러 문제들은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닌 것에서 일어난다. 교과서처럼 매뉴얼처럼 모두가 정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따르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그 간극을 좁혀서 모범적인 사회인이 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저항한다. 어찌 보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겠지만, 그것으로 잊혀가는 세계도 있다.
또 이런 것이 별로 고민이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른인 것처럼.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어떤 들은 행복한 가정 출신인지라 어른이 되기 위해서 스스로 할 일이 별로 없는 듯했다. 그런 이들은 그냥 배운 대로 살아간다. 말하자면 그들은 나무 가까이 떨어진 도토리 들이다, 그들이 걷는 길에는 갈림길이 없다. 길을 아예 떠나지 않는 이들도 있다. 출발하기도 전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나는 그들의 그 확실성에 따르는 안락이 부러웠지만, 나이가 들고서는 스스로를 발명하고 탐구할 필요가 적은 삶에 대한 감정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스스로 서는 데에는 진정한 자유가 있었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데에는 일종의 평화가 있었다.
-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중에서, 리베카 솔닛
고민과 불안이 없는 확실한 삶이 부러울 때가 있다. 심장이 없는 기계가 되거나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처럼 냉담하게 그 어떤 시끄러운 소리 없이 깔끔하고 깨끗한 진공상태를 동경하는 경지에 이를 정도의 고통과 슬픔을 알고 있다.
할러가 바라던, '좋은 냄새가 나는 방'이라던 것은 어쩌면 극도로 황량한 자신의 내면에 대한 반발이자 일종의 이데아였을지도 모르겠다. 병적으로 고통받으며 분열하는 황야의 이리가 아니라, 누가 봐도 건강한 소시민으로서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
그렇게 되기 싫은 것일까 되고 싶지만 못하는 것의 경계는 뚜렷한 것일까.
그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내면을 누군가에게 과연 털어놓을 수는 있을까. 보여준다면 감당은 될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섬세하고 이지적이고 괴팍한 인간으로 사랑하다가 갑자기 그의 속에 있는 이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실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리는 누구나 그렇듯이, 전존재로서 사랑받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가 사랑을 받고 싶어 한 그 사람들에게 이리의 모습을 감추고 기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속에 있는 바로 그 이리를, 자유롭고 거칠고 야생적이고 위험하고 힘찬 그 무엇을 사랑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도 거칠고 심술궂은 이리가 또한 인간이어서 친절하고 상냥한 것을 동경하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시를 읽고 인류의 이상을 품으려고 할 때면 엄청난 놀라움과 애처로움을 느꼈다. 특히 실망하고 마음 상한 이들은 대개의 경우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황야의 이리는 자기 자신의 이중성과 분열성을 그가 접촉한 모든 타인들의 운명 속에 불어넣었던 것이다.
타인에게 내보이기 어려운 그늘을 기꺼이 공유했고 살아갔기 때문에 시대가 달라진 오늘에도 우리는 그 그늘을 찾아간다. 자신 안의 미친 사람을 내보여준 용기 덕분에 우리는 그 속에서 숨을 쉰다. 말해지기 어려운 것들에 이름을 붙여준다. '황야의 이리'라는 코드로 우리는 그 복잡한 심연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한다 해도 거칠고 날카로운 눈빛의 이리를 그래서 한번 더 바라보게 되었다.
Augus & Julia Stone - Paper arop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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