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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Sep 23. 2024

절망은 나의 일이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

하나의 문을 노려본다.


지칠 때도 지났건만 그 문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나 그 주변을 서성인다. 문은 열려있고, 문지기가 서 있다.

문지기가 엄포를 놓는다. 금지를 어기고 들어가 보던가. 하지만, 나는 여기서 최하급이고 방을 지날 때마다 더 강력한 문지기들을 만나게 될 텐데 막강해질 것이다. 시골사람은 그렇게 문 앞에서 서성이고 주저하며 맴돌기를 반복한다. <변신>에 함께 수록된 단편 <법 앞에서>의 이야기다.


카프카 주변을 그 시골사람처럼 맴돌아본다. 한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다. 까다롭고 섬세해 보이는 표정 너머 복잡해 보이는 내면. 천재 소설가들 중에서도 특히 법점하기 어려운 사람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따라 살인자도 되어보고, 괴테처럼 죽음으로 향하는 슬픔에도 발을 담그고, 까뮈처럼 어머니의 장례식을 외면하고도 버텨보지만, 카프카는 첫 발부터 엄청나다. 심지어 사람도 아니고, 벌레가 되어야 한다.


카프카의 소설을 처음 읽을 때의 그 충격을 기억한다. 그 어떤 소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낯설음.

'그래, 나는 그것을 다 이해해'. 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다. 그냥 좋은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에서 오는 신선함과 미스터리가 있었다.

디킨스 같은 드라마틱함이나, 피츠제럴드 같은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 헤밍웨이같은 강단. 그런 매력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표현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이 문장 자체도 놀라운데, 다음에 이런 문장이 올 수 있다니!'

카프카 소설의 매력은 그만의 발상과 전개방식에 있는 것 같다. 그 근원은 결국 카프카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알아가야 할 산이다.


부조리를 다룬다고 해도, 까뮈나 카프카 모두 대놓고 의무적으로 긍정을 말하지 않는 게 좋았다. 사람은 긍정적이어야 해, 라는 강박에 지배받지 않는 것이 끌렸다. 까뮈는 그러다가도 결국엔 희망을 향해 가지만, 카프카는 그 마저도 안 한 것 같다.

'부정이어도 두려워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최악일까?'

그런 질문을 받는 느낌이었다. 타협하지 않는 가차없음이 좋았다.    

궁금한 사람이고 늘 써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몰랐다.  


그는 누구일까?

그러다가 용기를 주는 문장을 만난다.


우리는 조금씩 카프카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그는 현대 작가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접근하기가 까다로우며 생애와 예술은 자주 오해받아 왔다....
밀레나 폴락은 카프카와의 연애가 끝장난 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말했다. <그의 책들은 놀랍습니다. 그 자신은 더욱 놀라운 사람입니다......>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폴 오스터


혹시 까다롭고 힘든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오해였다. 폴 오스터의 말대로 이제 우리는 카프카를 알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많은 인물임이 분명하다.

카프카의 소설들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와의 깊은 충돌은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제 글은 아버지를 상대로 해서 씌어졌는데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아버지 가슴에다 대고 원망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해 댔지요. 그건 오랫동안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습니다. 그건 아버지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만 제가 정해놓은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지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를 견디지 못하는 소년이 보인다. 훌륭한 인물들은 대개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나. 어릴 적 TV만 틀면 보이던 온가족이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홈드라마 같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사람들 말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운운하기 전에, 여자애들도 친구들끼리 속내를 털어놓을 때에도 아버지에 대한 부담감, 혹은 반발은 흔히 등장하곤 했다.

창의적인 기질을 발휘해온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아들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자연스럽게 해방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존재는 세상을 똑바로 보고 싶은 아이의 눈에 더욱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감지되는 꽉 막힌 관료, 체제에 대한 답답함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프카는 글쓰기는 물론, 직업 선택, 결혼,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이었고 그 안에서의 고통과 절망을 고백했다.


저도 이해는 합니다. 아버지 쪽에서 볼 때 그 애(여동생 오틀리)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아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볼 때 그 애는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아버지의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그에 대해 -절망하지는 않지만, 절망은 주로 저의 일이지요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아는 아이랍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


지나가는 말처럼 했지만 분명히 했다.

'절망은 주로 저의 일이지요.'


카프카는 어째서 그렇게 절망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그는 '은행 사기범이 사소한 은행 업무에 관심을 가진 직원'이 되듯이 자신에게 '무관심의 자유'를 허용해 줄 직업으로 법학을 택하게 되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보험회사에서 근무를 하고 퇴근하여 새벽까지 글쓰기를 이어가는 생활을 이어갔다.

공무원 같은 안정된 직종에서 일하면서, 퇴근 후에는 글쓰기에 몰입한다는 생각이 낯선 것은 아니다. 불안정한 생계를 이런 식으로 해결을 하고, 남은 시간에 어떻게든 써본다는 시도 역시 카프카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무지막지하다. 어떤 직업이 이를 쉽게 허용할 수 있을까. 퇴근 후 일을 완전히 잠궈둘 수 있는 직장 생활? 혹시 있다면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

하지만 카프카는 했다. 표현은 쉽게 했지만 법에 관련된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사실상 자신을 갈아서 글을 쓴 것이다.

그러다 마흔한 살에 짧은 생애를 마쳤다. 지금 같으면 뭐라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은 그냥 문 앞에서 서성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지기의 심문에 답하고 돈을 써서 매수도 한다. 어찌나 귀찮게 했던지 문지기 외투의 벼룩까지 알아볼 정도였다. 이 생활이 지속되면서 시골 사람은 지쳐간다.

'그는 이 불행한 우연을 처음 몇 년 동안은 큰 소리로 저주하다가, 후에 나이 들어서는 그저 혼자서 속으로 투덜거린다.'

이 불행한 우연 속에 체념해 가던 어느 날, 그에게도 한 줄기 빛이 찾아온다. 죽음을 앞둔 그날, 지금까지 '문지기에게 던져보지 못한 하나의 물음'에 눈이 밝아진다. 그리고 문지기에게 찾아간다.

"이 여러 해를 두고 나 말고는 아무도 들여보내 달라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문지기는 이 사람이 곧 임종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그의 스러져 가는 청각에 닿게끔 고함지르듯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다른 그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었어.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제 가서 문을 닫겠소"

-<법 앞에서> 중에서,  프란츠 카프카


이 짧은 단편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시골 사람이 평생을 서성대며 맴돌기만 한 문에 들어간 사람이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오직 나만을 위해 열려있는 문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만이 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문을 알아보고 있는가?

다시 카프카의 절망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자신에게 엄청나게 높은 기대치를 설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치열한 노력, 자신을 초월하려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는 그의 작품을 그토록 중요한 문학의 금자탑으로 만들었다,...
그의 예술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벽하게 연소시킨다는 뜻이었다. 그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글쓰기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글을 썼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글쓰기는 기도의 한 형태이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중에서, 폴 오스터


카프카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열린 문을 알아보았다. 소설 속 시골사람은 그렇게 저물어갔지만, 카프카는 그 문 너머로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절망은 높은 기대치에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실패하고 또 절망했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의 절망에 빚이 있다고 느낀다.

눈 속에 먼저 발자국을 내 준 사람이 있었다.


Air -So Light is Her Footfall

https://www.youtube.com/watch?v=AQM6TC2pk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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