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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티 Sep 30. 2024

재능이 상품이 되지 못한다 해도

루이스 하이드의 <선물>

우리는 공기처럼 자본주의를 호흡하며 살아간다.


늦은 밤 보았던 TV 프로그램에서 어느 여행자가 외국의 해변에서 비어있는 의자에 앉을 때 자꾸 묻는다. 돈 안 내고 여기 앉아도 되는지? 누군가 비용 없이 가이드로 나서는데 기쁘기는커녕 의심부터 든다. 혹시 사기는 아닌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던 때가 있었다. 낙서처럼 휘휘 그려본 그림들, 끄적거린 글, 뚱땅거려도 즐겁기만 한 연주. 때로 감탄과 탄성도 터지고, 숨 가쁘도록 킥킥거리다가, 세상 진지해지기도 했다. 

제법 어른 노릇할 나이가 되면서는 좀 달라진다. 무언가 만들거나 창작을 시도하면서도 마냥 신나기가 어렵다. 이런 질문이 슬슬 고개를 든다. '왜 돈 안 되는 것들만 재밌지?' 

더 나아가서 좀 침울해진다. '아, 뭔가 이걸로 돈이 되게 해야 되지 않아?'

창작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면 더 심각해진다. 젊은 날의 패기는 과거가 되고, 혹시 돈도 되지 않는 작업에만 평생 매달리다가 이대로 소멸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하는 작업이 과연 그럴 가치는 되나.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날이 성큼 다가온다. 그럴 땐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세상을 돈으로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비틀거리는 날에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 한 두 가지 방법 정도는 마련해두어야 한다. 여든 살 이후에도 총총한 눈빛으로 작업하는 소설가, <시녀이야기>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 역시 알고 있다. 그래서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책 하나를 권한다.


<선물 gift>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주어진 것'인 '선물'인 동시에 '재능'이라는 뜻도 된다. 저자인 하버드대 글쓰기 지도교수이자 에세이스트인 루이스 하이드는 이 단어를 통해서 고대로부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까지 이르는 예술가와 상업성이 맺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통찰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전적인 나의 능력'으로 간주하기 쉬운 재능을 '선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금 다른 세상에 도달할 수 있다.


선물을 가지고 노동을 하기로 선택한 현대의 예술가라면 얼마 있지 않아 시장교환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두고 회의하게 마련이다. 가치란 곧 시장가치를 뜻하고 거래 라고는 상품의 구매와 판매로만 존재하다시피 하는 시대에, 선물의 결실이라고는 선물 그 자체뿐이라면 예술가는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어떻게 스스로를 먹여 살릴 것인가?


창작자가 모든 것을 바쳐서 선물을 만들어냈는데, 그거 외에는 남는 것이 없을 때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저자는 인디언들을 비롯한 부족사회에서 통용되는 사실을 거론하는데, 그들은 일찍부터 선물과 자본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선물은 다른 사람의 자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원칙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선의의 뜻으로 소를 선물했는데 받은 이가 그 소를 가지고 새끼를 치거나 더 많은 소를 산다든지 하면 그는 폭풍우에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 소로 다른 이에게 잔치를 베푼다면 선물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순환의 원리를 따라 계속해서 다른 곳으로 선물이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선물을 움직이게 하라." 

그렇게 선물로서 이 사회에 계속 작동한다면 결국엔 창작자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민간 설화나 예화들이 능력주의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좀 더 새로운 시각을 준다. 언제부턴가 고대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현대사회의 복잡성들을 걷어내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보는데 도움을 줄 때가 많다. 저자의 이야기 중에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이 있었다. 


"어떤 재산은 소멸되어야만 한다." 

소멸됨으로써 빈자리가 채워질 수 있다. 완전히 손을 놓지 못해서 새로운 것을 얻지도 못한다. 나날이 부의 축적이 미덕이요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주입받는 시대를 살면서, 얼마나 이를 놓치고 사는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썩어서 없어지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물질세계에서는 잊고 산다. 사실상 현대의 자본주의의 문제점 역시 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이에 '우아한 소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주고 순환하는 선물의 원리를 오늘날 비즈니스의 법칙에서도 보았다. 

"지위와 너그러움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재산을 내주는 일 없이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한 가지 선물의 중요한 특성으로 꼽는 것은 연결성이다. 선물은 사람 간의 유대를 확립하는 데 반해, 상품 판매는 필요한 연결을 남기지 않는다. 여기에 '포드 사'의 사례를 가져온다. 포드 사는 자사의 핀토 차량에 안전장치를 추가할지 여부에 대해 비용 편익 분석을 적용하여, 안전장치를 추가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다. 단기적으로는 무리 없어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 충돌사고로 500명이 화상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재판에서 포드사는 유죄 판결을 받고 그 차량 소유주에게 1억 달러씩 지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비용 편익 분석'에 생명의 가치는 반영되지 않은 셈이다. 포드사의 경영진들이 고객층에 자신의 가족들을 포함시켰다면 의사결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책에는 여러 사례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호퍼를 '보호된 선물의 영역'을 창조한 작가로 보았다. 그는 주 3~4일만 잡지 일에 쓰고, 나머지 시간은 집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도 선물의 영역에서 이루어진 그림을 팔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는 사람들이 없었다.


(에드워드 호퍼는) 1913년 서른한 살 때 그림 한 점을 250 달러에 팔고 난 후에는 10년 동안 한 작품도 팔지 못했다. 그런 다음 1925년부터 1930년 사이 그는 예술에만 의지해 생계를 잇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호퍼가 잡지를 위해 일한 것은 그의 예술의 일부가 아니라 그의 진정한 노동을 떠받치기 위한 노동으로 여겨져야 했다. 그러나 요점은, 그의 진정한 예술에 대한 시장의 수요가 커졌을 때조차 호퍼는 자기 재능의 진실성을 보존했다.


또한, 시인 월트 휘트먼과 에즈라 파운드의 생활에도 주목한다. 둘 다 자신의 예술로만 먹고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휘트먼이 남북전쟁 워싱턴에서 살았던 것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독일 또는 파리의 학생 같은 삶'. 

유럽의 매력 한 가지는 예술가의 한정된 생계수단을 수용하는 폭이 훨씬 크다는 것인데, 같은 조건으로 미국에서 살 때 가난한 사람에게 노출되는 모욕의 정도는 훨씬 심하다는 이야기를 쓴 편지를 소개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예술가의 낭만이나 감상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분명히 밝혀둔다. 이 책은 예술로 그럭저럭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로를 찾은 것이지, 부자가 되려는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님을 밝혀둔다.

모두가 성공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 삶을 영위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극심한 내적 빈곤을 기꺼이 수용한 예술가는 외적 삶에서 어떤 검소함을 견딜 수 있다. 추위나 굶주림을 견딘다는 얘기가 아니다. 캔버스에 자신이 상상한 색을 옮길 수 있는 사람에게 방의 크기라든가 포도주의 품질은 확실히 덜 중요하리라. 자신의 노래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작품으로 나올 때 그곳이 다락방과 골방이라고 해서 그 영혼이 모욕감을 느낄 일은 조금도 없다. 이탈리아 도보여행을 하면서 아름다움과 사랑에 흠뻑 빠진 젊은 시인이라면, 날마다 똑같은 빵과 보리수프로 저녁을 먹어도 견딜 수 있다. 받은 선물이 강력한 데다 그 선물에 접근할 수 있고 이를 작품으로 옮기는 예술가라면, 마셜 살린스가 수렵-채집인에 대해 이야기하듯 "절대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풍요의 경제를 누릴 수 있다."


책을 덮으며 몇몇 친구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집 한 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작품을 통해 확장된 세계를 경험하고, 이따금씩 유럽의 촛불 밝힌 고성의 하룻밤에 초대되거나 전혀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환하게 웃고 있던 사진 속의 그 친구를.


저자는 예술은 사고팔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작품이 품고 있는 선물적 특성이 우리가 예술을 상업화하는 데 어떤 제약을 부과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술을 담기에 상품이 충분한 그릇이 아닐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고 연구하는 과정 역시 그가 겪었던 '선물'의 과정이 아니었나 하는데, 이 책 역시 저자에게 물질적인 대가를 가져다주지는 못했고 비주류로 언제나 머물러야 했지만, 그럼에도 놀랍게도 절판되지 않고 계속해서 출판되고 있다고 한다.

재능의 진실성을 보존함으로써 통찰한 예술을 바라보는 놀라운 문장들을 선물 받는 것은 덤이다. 


화음을 인지하는 우리의 감각은 모차르트가 들었던 화음을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예술가처럼 표현하는 힘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가의 창작이라는 대행을 통해 우리의 존재라는 천부적인 자산을 알아보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를 선사받는다고도 볼 수 있다.


선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존재를 선사받는다.


Greenday -Wake me up when septermber ends

https://www.youtube.com/watch?v=rdpBZ5_b4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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