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카히트의 <파리 좌안의 피아노공방>
그것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다.
그 무렵 일에 많이 지쳐있었고, 매일같이 붙들고 있는 전화나 노트북이 전부가 아니라는 증명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다 내던지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북적대지 않는 조용한 길을 산책하는 일이었다. 일에서 비집고 나오는 온갖 잡음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이를 사라지게 해 줄 또렷한 신호가 있지 않을까.
꿈결처럼 어렴풋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차르트 소나타의 멜로디. 그 선율을 따라 지나버린 유년 시절이 들려온다. 비스듬한 언덕길 산 아래 있는 2층집에서 멈추었다. 널찍한 마당에 큰 나무가 하나 버티고 있는 그 집은 피아노학원이었다.
단발머리에 서글서글한 눈매의 선생님이 맞아주었고, 거실 한쪽 베란다 쪽에는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 코너의 작은 방. 처음 그 문을 열던 날을 기억한다. 방 안 가득 배어있던 나무 냄새가 코끝으로 확 다가왔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불러오는 그 피아노 냄새로 혼탁했던 잡음들이 조금 날아간 듯했다. 그날부터 발걸음은 계속되었다.
나의 동네에서도, 그리고 또 지구 어디엔가 서성대는 발걸음이 있다. 파리로 이사 온 그 미국인 사드 역시 이방인의 기분을 도무지 떨칠 수가 없었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도무지 섞이지 않는 그 무엇이 그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옛 피아노 수리점이자 공방에 이끌리게 된다.
그때 나는 내 욕망의 형태와 내 인생에서 음악의 자리가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이 작업장의 강렬한 유혹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공방은 나를 이미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그저 엄청난 숫자와 종류의 낡은 피아노를 둘러보며 즐거움이나 맛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 힘으로든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관능적인 환상에 굴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일까, 아니면 나도 모르는 어떤 힘에 굴복하게 된 것일까.
때로는 나의 선택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밖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발걸음이 조금 더 가뿐해질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 사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관능적인 환상에 굴복'했다고 표현했다. 또, 그런 환상에는 안내자도 있다.
공방의 주인 뤼크. 그는 그저 피아노를 파는 사람은 아니었다.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냉담하지도 않은 공방 주인 뤼크와 지나가던 주민 사드 사이의 유대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다른 것들은 하나도 필요하지 않다. 피아노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 그거면 충분했다. 사드는 뤼크가 피아노를 대하는 방식에서 세상을 읽어나가게 된다. 그를 알게 되면서 파리 그 동네의 진짜 내부로 들어왔다고 느낀다.
그것은 단지 공방에 풍부하게 넘쳐나는 웅장한 악기에 대한 호기심만이 아니라, 그가 묘하게 예술과 상업을 결합하는 방식에 대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자신의 고객, 자신의 공급업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수리하여 판매하는 바로 그 물건과 개인적인 관련을 맺으며 살아가는 장소.
그의 활동에 거울을 비추어준 적은 없지만, 그는 내가 그의 공방에서 얻는 즐거움을 보고 자신의 일이 일상의 영역 밖에 있음을 확인했던 것 같다.
피아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는 연주자와 작곡가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피아노 주변에는 말해지지 않은 더 많은 질문들이 있다. 사드가 꺼내본다. '물론 극소수의 독주자만이 정상에 이르러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 왜 그냥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연주하면 안 되는가?'
그날도 2층의 방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늦게 도착하다 보니 모두가 떠나고 나만 남았다. 때로 연습을 하다 보면 피아니스트 부럽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럴 때에는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도 없다. 그동안 연습해 온 시간이 주는 일종의 선물처럼, 아마추어 연주자에게도 그저 머물고만 싶은 시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좋다. 나와 피아노만 알기 때문에 더 좋을 것이다.
아마도 피아니스트들은 풍성한 그 순간의 기쁨을 간직한 사람들일 것이다. 진짜 연주는 리허설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의자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곧 완벽한 순간이 찾아왔다. 나는 다른 세상에 가 있었다.
"그 피아노 좋지?"
"네. 좋아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가족조차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걸 즉시 이해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세월이 흐른 뒤에 내 삶에서 피아노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했을 때, 나는 컬리언 선생님 같은 사람을 만나는 상상을 했다. 나에게 음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로부터 음악을 끌어낼 수 있는 직관력 있는 교사. 그러나 성인으로 연주를 즐기려면, 그런 사람을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대신, 내가 직접 찾아 나서서 나의 요구와 기대를 분명히 밝혀야 함을 알았다.
완벽한 피아니스트의 연주는 분명 감탄할만한 것이지만, 그에 이르기 전까지도 마음을 움직인 자취들이 흩어져있다. 어린 시절 작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고, 처음으로 곡을 완성하던 순간. 다음 코드의 진행이 너무 궁금해서 미리 악보를 쳐보던 시간, 예상하지도 못했던 작곡가의 곡의 전개에 놀라 환희를 조금은 경험하던 일. 그가 써 내려간 음표를 조금이나마 더듬어서 만져보는 일.
조금 이상한 얘기지만 서툴러도 유려하지 않아도 그 곡을 치는 것으로도 연주의 아름다움은 전해질 때가 있다. 나만의 해석도 때로는 환상이 된다. 좀 흐트러진 연주라고 해도, 그 곡이 어떤 곡이다 알아차리게 되는 것으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면 과장인가. 정말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거야말로 작곡가의 존재감이 아닌가.
그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각의 음악 뒤에 놓인 영감을 은밀히 공유해 왔던 것이다. 소리로 이루어진 이 간접적인 세계는 나에게 매우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이 보지 못한 음악가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나만 아는 유대가 있었다.
모험은 그렇게 감추었던 표정을 드러낸다.
(10월에는 리버피닉스의 피아노를).
영화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중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Bl4tGsOGw_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