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바레의 검은 고양이 피아니스트
붉은 벨벳 커튼의 묵직한 주름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불빛.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렴풋한 기억이다. 어른들 따라 카바레에 갔던 것 같다. 아이들은 못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어떻게 입장했는지 미스터리이다. 멀찍이 사람들 뒤통수만 보이는 숲 같은 풍경을 넘어서면 그 끝에 무대가 있었다. 큰 음악과 뒤섞인 말들,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엉켜서 시끌벅적했고 무대 위에서는 가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춤추는 무용수들이 있었다. 그 동작보다는 카바레 특유의 어둑한 분위기와 색색의 조명의 반짝임에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카바레의 시작은 유럽이었다. 무도장이나 쇼를 보는 술집인 것은 비슷하지만 좀 더 확장된 공연장 버전이라고 할까. 연극, 쇼, 만담 같은 다양한 장르의 소극장 같은 공간.
19세기말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들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카바레는 그들이 드나드는 실험공간이기도 했다. 카바레(Cabaret)의 어원은 라틴어 'cavus(구멍)'이나 'cave(동굴)'에서 비롯되었으니 얼핏 음지의 기운이 배어있다. 공연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 예술, 정치에 대한 토론이 오가는 아지트였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가장 오래된 카바레의 이름은 '검은 고양이(Le Chat Noir)'.
에드가 앨런 포의 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1887년 군대에서 갓 제대한 20대의 피아니스트가 그곳에 나타났다. 또 한 사람의 포 마니아가 이 카바레에 등장한 것은 어쩌면 운명일까.
병적으로 날카로워진 감각 때문에 특정한 음식과 옷만 고집하던 '어셔가의 몰락'의 주인공 로드릭처럼 그는 자신만의 유별난 취향을 가졌다. 블랙 수트만 입었고 중절모에 지팡이를 빠트리지 않았다. 음식은 하얀색으로 된 것만 먹었다. 그가 직접 남긴 기록은 이렇다.
'나는 흰 음식만 먹는다. 삶은 달걀, 설탕, 갈아낸 뼈, 죽은 동물의 지방, 송아지 고기, 소금, 코코넛, 흰 물로 익힌 닭고기, 과일에 핀 곰팡이, 쌀, 무, 장뇌가 들어간 순대, 파스타, 흰 치즈, 목화 샐러드, 그리고 몇 종류의 생선(껍질 없이)'
건강 상태가 좀 걱정되는 목록이다. 과일에 핀 곰팡이가 특히!
그는 카바레 검은 고양이에서 첫 일자리를 얻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는 돈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만지는 사람에게만 그것을 만지는 사람들에게만 기쁨을 준다.' 피아노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언젠가 TV에서 본 어느 침대 광고의 BGM에 놀란다.
이것은 위트일까, 고도의 상술일까.
그는 자신의 곡이 '가구 음악'으로 들리기를 바랐다. 카바레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주목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은 그저 우두커니 놓여있는 가구처럼 드러나지 않게 주변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했다.
'행진곡, 폴카, 가보트 등은 '가구음악'으로 대체되는 편이 낫다. '가구음악'을 요청하십시오. '가구음악 없는 모임, 집회 등은 있을 수 없다. 공증 사무소, '은행' 등을 위한 가구음악...'가구음악'에는 이름이 없다. '가구음악' 없는 결혼식은 있을 수 없다. '가구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한다. '가구음악' 한 곡 듣지 않고서 잠을 청해서는 안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잠을 설칠 것입니다.'
이쯤 되면 두 손 들었다. 그래도 주목받기 싫어했다는 부분이 끌린다.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가 될 수는 없다. 한번 연주하면 여인들이 쓰러져나갔던 리스트의 화려한 무대는 한편으로 피아니스트들의 슬픔이기도 했다. 쇼팽은 큰 무대에서 연주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그는 소수만 모인 살롱에서 주로 연주했으며, 후반에는 그마저도 손을 놓는다. 굴렌 굴드 역시 극도로 예민한 까닭에 연주하면서 청중들의 반응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했고 나중에는 스튜디오 녹음에만 전념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그 유명한 허밍도 그래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역시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타일을 만든 것이다.
전무후무한 이 괴짜는 바로 '짐노페디'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에릭 사티(Erik Stie)이다.
그의 진가는 그렸는지 쓴 것인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악보에서 드러난다. 지시어들을 본다.
'매우 반짝이는, 의문을 가지세요. 한 걸음씩, 혀 위에서, 튀어나가지 마세요. 커다란 친절 속에서, 거만하지 않게, 잠시동안 홀로, 공허함을 얻을 수 있도록, 매우 혼란스러운, 이 음을 더 멀리 가지고 가세요, 음을 숨기세요.'
-최정우, <사유의 악보> 중에서
'매우 반짝이는'은 혹시 트레몰로 같은 느낌일까. '커다란 친절 속에서' 건반에 닿고 싶어 진다. '공허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번 손가락을 움직여보고 싶다. 손가락으로 밀고 나가는 건반 위의 시다.
에릭 사티는 몽마르트르의 작은 카바레에서 생계를 이어갔다. 구불구불 좁은 골목들로 이어진 몽마르트르를 지나 외곽의 작은 5평의 방에 살았으며 평생 '가난뱅이 씨'로 불릴 정도였다. 철 모르는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놀렸어도 그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에릭 사티가 그린 마을의 풍경도 있다.
'공상으로 가득하며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개인 소유의 작은 중세풍 마을, 주철로 지어진, 안락하고 오래된, 수상쩍은 가옥, 무서운 외관에 험궂은 정원이 딸린 (마법사를 위한) 낡고 조잡한 가구와 함께'
그의 좁은 방에 평생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집에서 발견된 것은 중절모와 지팡이들, 그리고 뜯지 않은 똑같은 여러 벌의 옷들이 전부였다. 그리고 피아노.
그는 자신의 피아노가 없는 피아니스트였다.
방에 피아노가 있기는 했지만 쓸 수 없는 상태였다. 벽 쪽에 건반이 향해있거나 페달이 묶여있었다고 한다. 다닥다닥 붙은 동네에서 소음 걱정으로 실컷 연습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피아니스트의 내면 한 구석에는 큰 소리를 낸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혹은 염려가 잠재되어 있다.
'짐노페디'같은 잔잔한 곡들 -가구 같은 음악만 쓴 피아니스트로 아는 것은 에릭 사티를 대단히 오해하는 것이다. 그의 기질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아방가르드 전사와도 같은 음악을 많이 남겼다. 그가 '가구 음악'을 말한 것은 그저 조용함을 추구했다기 보다는 과잉의 장식 요소로 넘쳐나던 '바로크'나 감정을 듬뿍 담아 연주했던 당대 낭만주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침묵으로 일관한 연주로 충격을 준 '4분 33초'를 작곡한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가 가장 영감을 받은 음악가로 꼽은 인물이 바로 에릭 사티이다. 사티는 박자 기호와 세로줄이 제거된 한 장의 악보 <괴롭히기 Vexations>를 쓰고 840회나 반복하기를 주문한다. 아주 천천히 연주하여 길게는 20시간까지 이르는 이 곡은 결국 존 케이지가 4명의 연주자로 교대하여 18시간 동안 이어간 끝에 완성한다.
많은 연주자들이 이 곡에 도전했다가 극심한 짜증을 내며 '인내'하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늘어갔다. 연주자만 짜증 났을까? 관객도 괴롭기는 마찬가지. 그 긴 시간을 누가 견뎌낼 것인가. 어쩌면 중간에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에릭 사티는 왜 이런 곡을 썼을까.
그는 곡에 대한 무관심과 동시에 작곡가에게도 관심을 주지 말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 무심하고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기를 바랐다. 당대에 유행하던 후기 낭만주의 인상주의에도 영향받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에릭 사티가 알려진 것은 죽음 이후이다. 살아생전 가난과 고독 속에서 몽마르트르의 검은 고양이롤 오가며 음악가의 길을 걸었다. 종종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산해진 거리, 가난한 예술가들의 동네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발명해나가고 있는 에릭 사티를 생각해 본다. 과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니멀리즘, 혹은 중세의 고즈넉함과 동시에 현대적 파격과 도발을 보여준 대담성.
에드가 앨런 포로 연결된 몽마르트르의 작은 카바레를 드나들던 검은 고양이 신사가 남긴 발자국이 점점 커져간다.
*참고 인용 '에릭 사티, 이것은 음악이 아니다', 사이나 료스케
*그림은 '에릭사티의 스튜디오' (The Studio of Erik Satie by Santiago Rusinol, 1891)
Erick Satie - Gymnopedie No. 1
https://www.youtube.com/watch?v=S-Xm7s9eGx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