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P 그리고 앨리스의 비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앨리스는 아빠에게 묻는다. 자신이 경험한 이상한 나라를 아무리 설명해도 누구도 믿어주질 않아 답답하다. 아빠는 대답한다.
"넌 완전히 돌았어. 하지만 비밀 하나 알려줄게. 멋진 사람들은 다 그래."
팀버튼 감독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좋아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팀버튼은 루이스 캐럴의 원작소설에서 이 대사를 좋아했던 것 같다. 오래전에 봤던 팀버튼 전시회에서도 이 대사가 벽에 프린트되어 있어서 한참 동안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어쩐지 미쳤다고 할까 봐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대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것은 좀 이상한 소리를 해도 상대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가치관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들은 상상하지 못하는 멋진 세계의 일원일 수도 있다는 기대도 실어준다.
팀버튼은 내향적이고 공동묘지 탐험을 즐기는 아이였다. 영화 <가위손>의 쓸쓸하고도 이상한 에드워드, <비틀쥬스>의 괴짜 유령 같은 성격도 이상하고 생김새도 기괴한 소외받는 캐릭터들은 그 경험을 거쳐 영화에서 다시 탄생했다. 이처럼 몽환적이고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이 '버트네스크(Burtoneque)'라고 불릴 정도이다.
팀 버튼의 두 번째 전시 소식을 들은 것은 2022년 DDP에서였다. 그는 보통 한 도시에서는 두 번 전시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013년 첫 서울 방문에서 광장시장에 들렀다가 좋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고, 또 하나는 DDP에서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DDP를 지은 건축가 자하하디드를 존경한다고 했다.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
2014년 자하하디드가 건축한 DDP가 완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냉담했다. 우리 땅에 이런 형태의 건축물이 있었던 적이 없었다. 온통 은빛 패널로 뒤덮여있는 하나의 유선형 덩어리 같은 낯설고도 이질적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하나의 건물이라는 이미지를 깬 이 건축물 외형뿐 아니라 주변과도 전혀 조화되지 못한다고 비판받았다.
이전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추억도 한 몫했을 것이다. 떠들썩한 함성이 울리는 야구장이기 전에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국가를 지키던 훈련도감이 있던 장소이기도 했다. 국가의 유물이 있는 곳인데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흉물이 들어온다고 말들도 많았다.
"당신의 건축엔 왜 직선이 없나요?"
자하하디드가 자주 받는 질문이었다. 그는 모래바람을 맞고 사막을 보며 자랐다. 어린 시절 그렇게 바라보던 자연이 그의 건축 세계가 되었다. "삶은 격자무늬에서 만들어지지 않아요. 자연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거예요. 어느 곳 한 평평하거나 균일한가요?" 그의 대답이다.
건축가 자하하디드 역시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의 일원이었을지 모른다. 이라크 바그다드 출신인 데다가 건축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이라는 조건은 큰 기회를 얻기 어렵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하디드는 아버지를 따라 여행을 많이 다녔고 건축 양식에 호기심을 느끼며 영국의 건축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유명 건축가 램 콜하스를 만났고 그의 회사에 들어가 승진하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그녀는 회사를 나와 사무소를 차린다. 자신만의 작품을 하고 싶었지만, 벽에 부딪힌다. 종이에만 존재하는 건축물만 그리는 '페이퍼 건축가'로 불리며 공모에 떨어지고 도전하는 시간들이 이어지다가 결국 수상하여 그때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자하하디드는 한국인이 정원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 주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DDP의 천정은 산책하기 쉬운 정원처럼 만들어졌다. 건물 뒤편에는 야구장에 있던 조명탑 두 개를 남겨놓았다. 건축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건물 사이에 보존되어서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미래의 어디엔가 과거의 유물이 보존된 세계. 코너를 돌면 회전목마가 돌아간다. 유물들로 둘러싸인 곳에 사람들이 앉아서 쉬고 있다.
건축가는 단순히 걷고 쉬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산, 바람, 물결, 우주, 도시. 자하하디드가 DDP를 통해 바라본 풍경이다. "건축은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전시와 패션의 1번지가 된 DDP에 언젠가 오로라가 뜬다는 뉴스를 봤다. 해질 무렵 어둑해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주변을 걷다가, 유려한 은빛 곡선 사이로 초록빛이 새어 나오는 거을 발견 했다.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 초록빛을 쫓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오로라가 피어나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길을 따라 도착한 곳에는 폭신한 잔디가 펼쳐진 평원이 드러났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오로라를 즐기고 있었다. 어두움 속에서 초록빛들이 떠돌고 음악이 흐른다. 도란도란 나들이 온 가족들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미구엘 슈발리에의 <보레알리스 Boreali>라는 작품이다.
서울에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마주친 기대해 본 적 없는 기이하고도 황홀한 '서울라이트'의 시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