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커피애호가 발자크가 말하는 바쁜 삶에 대하여
커피에 관한 한 그보다 유명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쉴 새 없이 커피를 마시고 일에 쫓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패턴은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이 아니었을까. 19세기에 이미 요즘 사람처럼 바쁘게 살았던 사람이 있다. 하루 50잔의 커피를 마시며 하루 12시간씩 일했던 그를 최초의 '바쁨주의자'의 위치에 올려놓아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책장을 넘기다가, 잠시 멈춘다.
'발자크는... 현대 사회의 생존경쟁으로 인해 대도시 주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 삶, 즉 뭔가에 쫓기듯이 서둘러야 하고 때 아니게 파멸에 이르는 삶을 살았다... 발자크의 인생의 한 창조적인 정신이 그러한 삶을 공유하고 그것을 자기 삶으로 살아간 최초의 실례를 보여준다.'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타우스, <발자크> 중에서
커피 CF의 모델 부럽지 않은 상징으로 인용되는 발자크지만, 정작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대개 글쓰기를 위해서 커피를 계속 들이켰다는 정도의 이미지다. 책의 문장으로 궁금해진다. '발자크 인생의 한 창조적 정신'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살았을까.
요즘 사람들에게 바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흔히 말하듯 '바쁜 건 좋은 것'이다. 어쩐지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꽉 채워진 스케쥴러만큼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상징을 찾기도 쉽지 않다. 바빠서 못 간다는 것은 가장 편리하고도 매력적인 핑계다. 나는 몰두할 것이 있고, 만나고 싶다고 해서 언제든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야. 안 된다고 하니 상대방은 더욱 아쉬워진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만 가득하면 어쩌다 내 스케줄이 비어있는 내가 좀 초라해지기도 한다. 남들은 다들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데, 나는 뭐 하고 있는 거지? 한바탕 바쁨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가 텅 비면, 걷잡을 수 없는 우울이 찾아오기도 한다.
19세기 파리라는 급변하는 자본주의 도시를 살았던 발자크는 욕망과 계급 상승, 몰락, 사랑이 물결치는 사회 구조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 바빴다.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낸 한편, 약간의 허세를 굳이 감추지 않으며 그 시대의 복잡한 공기를 가로질러 나갔다. 알고 싶고 이루고 싶었던 그의 욕망이 발자크의 고유한 창조적 정신과 만난 것이다. 이런 도시의 리듬이 그의 서사 구조이자 에너지였던 셈이다. 그 치열한 바쁨 속에서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발자크는 사람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일하는 인간, 생각하는 인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 다시 말해 그가 본 세 가지 존재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바쁜 삶, 예술가의 삶, 우아한 삶.
그토록 바쁘게 살았던 발자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우아한 삶'으로 본 것이 흥미롭다. 발자크의 에세이 <현대생활의 발견>에는 우아함의 정수가 무엇인지에 대한 유머와 위트가 번뜩인다. 바쁜 삶이 우아한 삶에 대해 느끼는 결핍이 드러나는 방식이 눈길을 끈다.
'필 장관이 샤토브리앙 자작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떡갈나무로 둘러싸인 집무실로 인도되었다. 샤토브리앙보다 수십 배 부자였던 그는 이 단순한 가구들 때문에 영국의 과잉공급 때문에 포화상태에 이른 자신의 순금, 순은 가구들이 단번에 초라해짐을 느꼈다.'
세상의 이치란 쉽게 알 수 없는 것이다. 바쁘지 않은 삶만이 바쁜 삶 사이에서 초라함을 느끼는 것만은 아니었다. 바쁜 삶이 이루어낸 순금, 순은의 가구들이 단순한 떡갈나무 가구들 앞에 초라함을 느낀다. 바쁜 삶은 수십 배나 부자였지만, 취향을 즐기고 안목을 살필 시간은 그의 스케쥴러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초라함이라도 경험할 수 있는 바쁜 삶은 그나마 다행인지 모른다. 더 최악은 보고도 전혀 못 느끼는 것일 테니.
발자크는 바쁜 삶이 우아함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했다.
'재능과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동하고 살아가는 원칙은 통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칙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도 통속적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아한 삶은 본질적으로 태도의 과학이다.'
발자크가 말하는 우아함은, 그렇다고 해서 쉽게 얻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타고난 것만으로도 훈련만으로도 이룰 수 없다. 그의 단호한 선언에 웃음이 난다.
'갈고닦은 우아함을 진정한 우아함이라고 하는 것은 가발을 머리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재능이나 돈, 권력을 소유했어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우아함, 가발이 아닌 진짜 머리털. 그러니까 발자크가 말하는 진정한 우아함이란 무엇일까.
'우아한 삶이란 외적이고 물질적인 삶의 완성이자 돈을 지적으로 소비하는 기술이다. 또는 모든 것을 남들처럼 하면서도 어떤 것도 남들처럼 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다.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정의하자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 속에서 우리가 본래 가진 매력과 취향을 발전시키는 일이다. 좀 더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내 재산을 자랑스러워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발자크가 그렇게 커피를 들이켜가며 20년간 쓴 소설이 100편이 넘는다. 그의 글이 빛을 보기까지 수많은 사업에 뛰어들어 실패를 맛보았고, 빚에 허덕여야 했다. 현실과의 전쟁을 치르며 쫓기며 글을 썼고 그 과정에서 초기 자본주의의 민낯을 제대로 겪어야 했다. 발자크의 고군분투하는 이런 기질이 그의 작품을 이끌었다. 한편으로 세상 바쁜 사람이 동경했던 것은 그 바쁨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는 우아함이기도 했다. 사람은 늘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갈망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다. 그래서, 바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좋은 것인가.
<타이탄의 도구들>의 저자 팀 페리스는 묻는다. 모두가 바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질문을 가져야 한다. '나는 지금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대부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리기 위한 과장된 피로는 아닐까?'
어떤 이들은 바쁨을 예찬하고, 또 누군가는 여가를 꿈꾼다. SF작가 아서 C 클라크는 '미래의 진정한 목표는 완전한 실업이다. 그래야 우리는 놀 수 있다'라고 했다.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도 기술과 자본의 진보로 미래에는 주 15시간만 일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가 시간이 늘어난다고 해서 인류가 그 시간을 놀면서 보낼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발자크처럼 치열하게 바쁜 에너지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에드가 앨런 포처럼 사회에서 자신만의 공간과 리듬을 지켜가며 창작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바쁜 것이 좋은 것이냐는 질문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르 라발리에 양은 우아하게 다리를 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매력적인 정신과 놀랍도록 풍요롭고 열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결점을 승화할 줄 알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이 이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 완벽한 남잔 완벽한 여자란 가장 무가치한 존재이다.'
바쁜 삶이 자신의 기질에 맞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기질을 제대로 알고 확장시켜 나갈 때 더 큰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발자크의 말처럼 정작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따로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이 이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
*참고 자료
<아케이드 프로젝트>, 발터 벤야민
<현대생활의 발견>, 오노레 드 발자크
<타이탄의 도구들>, 팀 페리스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 존 메이너스 케인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