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의 집이 도시에 있다면

꼭대기 다락방 vs 지하의 깊은 방

by 베리티

1970년대 어느 미국인이 파리의 루브르 거리에 방을 하나 얻었다.


낡은 아파트 7층 꼭대기 침대만 달랑 있는 작은 다락방. '샹브르 드 본(Chambre de bonne)'라 불린 그 방은 프랑스어로 '하녀의 방'이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부유층을 위해 일하던 하녀들이 거하던 작은 방인 셈이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시설은 열악하고 욕실을 공동으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사회적으로도 가장 바닥에 있는 계층을 상징했다.


이 방을 선택한 것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지만, 글을 쓰는 그에게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고독과 함께 거할 수 있는 방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사색을 위해서 그럴듯한 호텔방이 어울리지는 않았다. 자신의 현재를 마주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고립을 살아가려면 그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었다. 소설가 폴 오스터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단순하고 평범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내게는 늘 캘리반(셰익스피어 '템페스트'의 반수인) 같은 기질이 있어서, 최소한의 것만 갖춘 공간에 있을 때 더 편안합니다.'


<템페스트>에 등장하는 캘리반은 마녀 시코락스의 아들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섬의 토착민이다. 섬의 통치권을 장악한 마법사는 캘리반을 길들여 문명화시키려고 하지만 그는 반항하며 노예가 된다. 그렇게 인공 사회질서를 거부하고 야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거칠고 원초적인 감수성을 드러낸다.

폴 오스터는 어쩌면 작가로서의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해 수많은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캘리반처럼 원초적인 자아를 지켜나가길 바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 안에 있는 날 것을 지켜내기 위해 최소한의 방을 선택했을 것이다.

낯선 나라의 도시의 꼭대기 다락방에서 그렇게 고독을 초대했고 그 안에서 글을 썼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끌림으로 시작된 그 여정 속에 그는 놀라운 우연을 만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2차 대전 중 그 방에 숨어 지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소설이 바로 <고독의 발명>이다.


때때로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공간보다는 채워질 여지가 있는 소박한 곳이 더욱 끌릴 때가 있다. 바닥에 티끌 하나 없는 대리석의 눈부심보다 낡아서 빛바랜 마루가 편안히 느껴진다. 화려함 속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성냥을 켜서 타오르는 촛불을 밝히고 지하실로 내려가야 할지 모른다.


어디에나 똑같은 밝음을 가져다 놓는, 지하실에도 전등을 밝히는 우리의 문명생활에서는, 이제 초대를 손에 들고 지하실에 가지 않는다. 그러나 무의식은 개화되지 않는 것이다. 무의식은 여전히 지하실에 내려가기 위해 촛대를 드는 것이다.

-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바슐라르는 이렇게 덧붙인다. '몽상가의 집이 도시에 있다면, 주위에 있는 집들의 지하실은 깊이로써 지배하려는 것이 드물지 않다.' 여기에서 도시 환경에서 지하실이 갖는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지하실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잠재의식, 억압된 것들을 상징한다. 좁고 밀집된 도시에서 빌딩이 경쟁적으로 하늘 높이 솟아오를 때 지하공간은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심리적 경쟁을 반영한다.


카프카의 글에는 종종 지하의 깊은 곳에 갇혀있다고 느끼는 문장들이 보인다. 자신의 글쓰기 방식이나 삶의 형태를 표현할 때 지상에서 분리된 깊고 어두운 장소에 비유하곤 했다.


나는 세상의 맨 아래, 지하의 깊은 방에 갇혀있다. - 카프카의 일기, 1922. 1.19


카프카의 작품에는 지하 깊은 방의 이미지가 드러난 소설이 있다. 주인공 K가 도달하려는 <성>은 하늘을 향해 솟은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가 끊임없이 헤매는 미로들은 지하세계와 같다. 또한 땅굴을 파는 <굴>의 주인공은 외부의 거대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완벽한 공간을 만들어간다. 지하 깊은 곳에 대한 다채로운 묘사들이 펼쳐진다.


나는 장소를 바꾼 것이다. 나는 상부세계를 떠나서 나의 굴 안으로 들어왔으며, 굴의 영향력을 금방 느낀다. 이곳은 새로운 힘을 주는 새로운 세계이니, 위에서는 피로감이었으나 여기서는 피로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굴>, 카프카

폴 오스터의 다락방 '샹드르 드 본'과는 정반대로 카프카 소설의 공간은 지하의 깊숙한 곳을 차지하지만 모두 다 고독을 지켜갈 수 있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창작을 위해서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확보해야 할 내면의 공간은 이렇게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 방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걸어 다니며 현실의 무게이 치일 때에 주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완전한 고독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들의 고독에, 외로운 지의 시선에 최면당하는 것이다. 그 외로운 집과 우리들 사이의 유대는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이윽고 우리들은 방 가운데 외로운 집 밖에 꿈꾸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공간의 시학>, 가스통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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