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소설을 이렇게 써?

놀라서 침대에서 떨어질 뻔 했어

by 베리티

카프카의 작품이 정말로 이상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다.


따져보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유명한 <변신>의 첫 문장은 너무 알려져서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있었다고 할까.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페이지를 넘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빙산의 일각이었다. 아주 짧은 단편을 펼쳐도 놀람의 순간은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아, 뭐야?' 하면서 책장을 탁 덮거나 냅다 던져버리거나 하게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그다음에 뭐가 오는 건데?' 혹은, 이런 궁금증인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수습이 되는 건데?'


<시골의사>를 읽고 있었다. 한 겨울, 왕진 가야 하는 길. 의사에게 마차는 있는데 말이 없다. 하녀를 동원해서까지 말을 구해보지만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 도무지 방법이 없다.


당연하지, 누가 지금 이런 길에 말을 내주겠는가? 나는 다시 한번 뜰을 가로질러 걸었다. 아무런 가능성도 찾아내지 못하고, 망연히, 괴로워하며 벌써 여러 해 사용하지 않은 돼지우리의 망가진 물을 발로 걷어찼다. 문이 돌쩌귀에 걸린 채로 삐그덕거리며 열렸다 닫혔다 했다. 흐릿한 축사등이 그 안 끈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었다. 남자 하나가, 낮은 칸막이 너머로 웅크린 채, 푸른 눈의 민얼굴을 보였다. "말을 내어드릴까요?" 그가 물었다. 네 발로 기어 나오며 그가 물었다.


여기서 멈춘다. '네 발로 기어 나오며 그가 물었다.' 기이하고도 느닷없는 전개. 내가 뭘 놓쳤나 싶어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지만, 똑같다. 물음표가 이어진다. 이건 뭐지? 헛간에서 남자가 왜 네 발로 기어 나와? 사람이야 짐승이야? 그런데 이 기이한 마부가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제 집안에 무슨 쓸모 있는 물건이 있는지도 모르고들 지내시는군요"


이 말을 듣고 의사와 하녀는 웃는다. 페이지 너머 독자는 감탄한다. 이 벼락같은 전개를 이렇게 시치미 떼고 마무리하다니! 전혀 무리가 없다. 얼마든지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이렇게 해서 맥락 없이 네 발로 기어 나온 마부는 당당히 소설에서 제 역할을 해낸다. 이 한 줄이 그냥 쉽게 써졌을까?


문학박사도 아니고 분석에 대단한 재주도 없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카프카의 진짜 놀라운 면이자 매력은 발상이다.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넘어가는 행간의 절묘한 생략, 혹은 점프. 누구도 쓰지 않는 방법으로 문장을 밀고 나간다.


평범한 독자도 이렇게 충격과 환희를 오가도록 하는데, 소설가들은 어땠을까. 이 구역의 일인자는 <백 년의 고독>의 가브리엘 마르케스다. 한 거장이 다른 거장을 깨우는 결정적 순간이다.

마르케스도 젊은 시절 법학도였고, 그 시절 소설이란 논리적이고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주류였다. 그러다 그는 친구에게 빌린 <변신>을 펼친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한 소설가의 세계가 들썩인다. 세상을 뒤집는 지각 변동. 강력한 지진 너머 구원처럼 보이는 하나의 빛. 마르케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 세상에, 이런 식의 글쓰기가 허용된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이렇다면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케스가 안고 있던 고민의 실마리가 풀렸다. 하나는 할머니가 들려주신 기이한 전설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자유였다. 소설은 왜 벌레로 변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 논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벌레로 변했다. '오늘 날씨가 추워.' 그렇게 일상을 말하듯이 카프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레가 되었다고 썼다. 작가에게 설명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카프카의 글쓰기 세계관이 마르케스에게 스파크를 일으켰다는 점에 쉽게 수긍이 된다. 카프카는 현실을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건조하게 쓰고, 마르케스는 총천연색 꿈으로 마술적 리얼리즘을 펼친다. 왜라는 논리 대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나고, 인물들은 호들갑 떨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었을 때 울고 불고 난리 치는 대신 출근을 걱정한다. 마르케스의 소설에서 사람이 날아가도, 빨래와 같이 날아가네! 정도의 일상적 표현을 보여준다. 부조리를 사실로 다루는 태도는 공통적이다.


영미권 '짧은 소설의 거장'이자 카프카 소설의 번역가, 리디아 데이비스는 이렇게 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카프카만이 그렇게 이상한 것들을 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소설을 쓴다고 할 때 대개는 써야 한다고 배운 것들을 쓴다. 내가 그렇게 느껴서, 내가 아는 세계는 이래서가 아니라 소설이라고 배우고 믿어왔던 것들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카프카는 조금 달랐다. 리디아는 카프카를 이렇게 본다.

'그는 사람들이 관심 없어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그것을 글로 쓰고자 하는 충동을 결코 잃지 않았다.'

카프카는 누가 이런 걸 소설로 쓰겠냐고 할만한 것들을 썼다. 누가 볼 것인지 하는 것은 다음 문제였다. 자신이 철저히 호기심을 느끼는 대상을 쓰는 것을 인기 없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았다.

리디아 데이비스는 카프카만의 독창적이고 대체불가능한 기이함이 어디서 오는지 파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카프카의 일기를 주목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서 있는 장소에서 벗어나려고 발을 들어 올리는 일을 영원히 계속하는, 거리에서 드러나는 불만의 풍경.'


문제를 알고 있고 무언가 해보려고 반복하기도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며 끝나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 그것이 카프카의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세계관이다. 세상의 부조리에 갇혀버려 움직여보려 하지만 아주 미미한 동작 뿐인 풍경이 계속된다.


<시골의사> 역시 마찬가지다. 네 발로 기어 나오는 마부를 고용하여 왕진까지 어렵게 갔건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치료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아무리 애써본들 환자 가족들의 불신과 비난만 얻어간다. 이제 집에 가는 길이나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의사는 가망 없는 이 삶을 통탄한다.


벌거벗은 채, 이 불운은 극한 시대의 혹한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지상의 마차에다 지상의 것이 아닌 말들로, 늙은 나는 나를 이리저리 내몰고 있구나. 내 털외투가 마차 뒤에 걸려있다. 하지만 내 손은 거기까지 닿지 않고 변덕스러운 환자 주위의 불한당들 중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구나! 속았어! 한번 야간 비상종의 잘못된 울림을 따랐던 것 - 그것은 결코 보상받을 수가 없구나.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발버둥 쳐보지만 결국엔 꼼짝달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다가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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