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가장 멋진 자랑 하나

선물 같은 시간 우리는, Blur live in Seoul 1997

by 베리티

오래전 일이다.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너무 조상님 같은 행동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언젠가 캐나다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런 말을 했다. 글을 쓰는 목적으로 가장 좋은 것은, 그 시대와 그날의 일을 기록한다는 의미도 크다고 했다. 내가 경험하는 일이 그 시대에는 누구나 아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그 시대의 가장 흔한 가정식 요리법 같은 것도 막상 제대로 찾아보려면 찾기가 쉽지 않다고. 사소한 것이라 여기지 말고 기록을 남기라! 그리고 당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라.

마가렛 애트우드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초판으로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독자로서 자부심 가득하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들어본 것 중에 가장 멋진 자랑 중 하나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음악 리스너로서의 환희 가득한 시간들을 돌아보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공연이 있다. 그즈음에 리뷰 노트를 남기긴 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다시 찾을 수가 없다. 늦긴 했어도 기억을 더듬어서 다시 시계를 돌려본다.


선물 같은 시간이 왔다.

1997년. 블러의 서울 내한공연.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그날의 일정은 모두 비웠다. 저녁 공연이니 해질 무렵 와도 충분하겠지만, 하루 종일 블러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런 거야말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닌가. 티켓 예매에 부지런하지도 않고 기어코 앞자리를 사수하는 열혈팬인 적은 전무후무했지만 이미 남들 학교 가는 시간에 공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10월의 하늘은 맑았고 정동 길은 고즈넉했다. 햇살은 크래커가 부서지듯 쨍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정동 거리를 특히 좋아하게 된 것은.


가을 하늘의 절정을 보여주던 날의 정동문화회관. 몽글몽글한 조각구름 아래 먼저 도착한 팬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 줄에 합류해서 운동장 같은 마당에 앉아서 워크맨을 듣고, 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같이 보기로 한 친구는 좀 늦게 온다고 했다.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 자리할 무렵, 아차! 점심에 대한 아무 대책도 없이 왔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이미 기다린 시간이 있는데 잠깐 밥 먹자고 나갔다 올 수도 없고, 이렇게 줄 서면서 자리 맡아달라고 해도 되나? 도서관처럼 가방이라도 던져놓고 가야 하나? 아직도 한나절 기다리려면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이러다가 시작도 전에 지치는 거 아닌가. 온갖 궁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거 드실래요?"


누군가 갑자기 쑥 내민 것은 버거킹 와퍼세트였다. 뒷줄에 서 있던 팬들이 있었는데 두 명이서 같이 왔던 걸로 기억한다. 한 명이 종이백을 부스럭거리며 뒤적이더니 그중 햄버거를 나에게 준 거다. 눈이 동그래져 망설이는 사이 이미 내 손에 쥐어주었다. 팬의 자격으로 주어지는 특권이다. 다들 블러 공연을 직접 본다는 설렘으로 기적 같은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1997년에 블러가 내한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케이팝으로 어느 정도 위상이 있는 요즘을 떠올리면 안 된다. 당시 한국은 유명 뮤지션의 투어 리스트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었고, 전성기가 한참 지나서야 한번 찾아올까 말까 한 정도였다.(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앨범 판매고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 크다). 브릿팝 밴드 중에서도 더 유명한 라디오헤드나 오아시스도 아직 못 온 마당에 블러가 어떤 이유로 갑자기 한국에 오게 된 것일까?

좀 엉뚱한 명목이지만 한국-영국 100주년 수교 기념의 일환으로 공연이 치러진 것이다. 그즈음 부쉬(bush)와 에릭클랩튼도 왔다. 어떻게든 공연을 성사시키려 했던 기획사에 열성 덕분에 우리는 인생밴드의 전성기를 눈앞에서 보는 선물을 받았다. 흥행으로 말하자면 객석이 꽉 찰 정도는 못 되었지만, 찾아온 팬들에게는 이보다 더한 감격은 없었다. 적은 수라 해도 공연으로 모일만한 사람들이 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드디어, 5집 셀프타이틀 앨범의 첫 곡 'beetlebum'의 기타 리프가 서울에서 울려 퍼진다. 조명 빛 아래 블러 멤버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한국 관객들이 낯설었을까. 처음엔 낯가리는 아이처럼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기타를 치면서 관객들을 유심히 보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서울 도착 후 TV 연예정보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장난기를 감추지 못하는 아이돌 같은 태도에 놀랐는데, 정작 무대 첫인상은 달랐다.

페이지 넘기기 아까운 책처럼, 한 곡 한 곡 끝나는 시간을 꼭 붙들고 싶은 무대가 이어졌다.

셋 리스트는 새 앨범 위주로 채워졌고, 조용히 시작되었던 무대는 환호와 열광으로 가득했다. 데이먼 알반은 땀범벅이 되도록 노래하고 점프했으며, 그레이엄 콕슨은 기타를 수시로 바꿔가며 연주했다. 알렉스 제임스는 거만하게 담배를 물기도 했고 드러머 데이브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여성팬들이 많을 거라는 보기 좋게 예상은 빗나갔다. 객석 어디에선가 몸을 부딪히며 노는 모싱이 있을 정도로 남팬들이 비중이 그 이상이었고, 그 시절 팬들은 누군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매너를 잊지 않았다. 어쩌다 휩쓸리게 되는 여성팬들이 있으면 어디선가 손들이 나타나 바깥으로 스윽 꺼내주곤 했다. 밴드도 객석도 서서히 서로의 만남에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곡 badhead도 셋 리스트에 포함되어 브라스까지 동반되어 연주했고 (나를 위한 선곡이라고 내 멋대로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며), 댄스 넘버 girls&boys의 후렴구에서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렸을 때 놀랍도록 큰 소리로 떼창이 들려왔다. 이렇게 같이 부를 정도로 골수팬 인증의 순간이었다.

밴드는 노래하다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었지만(후에 데이먼 알반은 고릴라즈로 내한해서 결국 무대에서 내려온다!), 1997년 10월 21일 저녁은 스냅사진처럼 기억 속에 선명히 자리 잡았다.

구름이 떠 있던 맑은 하늘과 바짝 말라있던 모래알 운동장. 같은 팬끼리 오갔던 배려와 존중, 밴드를 태운 차가 들어올 때의 환호, 혼자 정동문화체육관을 서성이던 데이먼 알반이 건물 난간에서 손 흔들어주던 순간과 사소한 액션에도 반응하던 팬들, 생수를 뿌려서 식혔던 무대의 열기. 물결처럼 잔잔했던 조명은 환희의 시간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블러의 굿나잇-인사와 함께 가을밤의 꿈처럼 아득해져 갔다.



set list

1.Beetlebum

2.M.O.R.

3.There is no otherway

4.Slow dowm

5.Golbe alone

6.Movin' on

7.Badhead

8.Country said ballad man

9.Chemical World

10.Chinese bombs

11.Advert

12.Pop scene

13.Girls & Boys

14.Death of a party

15.This is a law

encore

16.The universal

17.On your own

18.Parklife

19.Coping

20.I'm just killer ofr your love

21.Song2


블러 내한 공연 mnet 방송분

https://www.youtube.com/watch?v=Y3l74ctBs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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