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주변을 부러워만 하다가 모두의 부러움을 사기까지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이곳에 남아야겠다고 결심하기도 전부터 어떻게서든 이곳에 정을 붙이기 위해 노력해 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모든 게 안정화되기도 전에, 몸살 감기에 걸린 즈음부터 이미 새로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었다. 일찍 자는 나와 달리 늦게 자고, 거실과 방 어느 곳에서든 시끄럽게 떠드는 친구들 때문에 밤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던 탓이다. 결정적으로 이 집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것은, 무려 14명이 함께 사는 곳이니 당연히 안 맞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나와는 달리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즐겁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점점 주눅드는 내 모습을 참을 수 없었던 데에 있었다.
함께 있을수록 나를 외롭게 만들었던 두 친구가 있었다. 둘 다 모두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시 내가 구사하는 영어보다 훨씬 더 원어민스럽게 영어를 썼고, 프랑스 억양이 강하게 묻어 났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영어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는 셋 다 또래였는데, 그들은 나와 다르게 요리를 매우 잘했고, 액티비티를 좋아했으며, 각자에게 어울리는 일을 금방 구해서 호주 살이에 빠르게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그들에게도 어려운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그들이 이뤄 낸 것들에 대해서만 부러워하고 또 부러워했다. 쟤들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나라에서 왔잖아. 그런 삐뚤어진 생각도 하면서.
타인과 비교해서 내게 남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생각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들같이 멋있는 사람들 옆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마치 내가 그들이라도 된 양 뿌듯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일순간뿐이었고, 현재를, 오늘을,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점차 곁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나를 옭아매어 현재와 오늘,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있는 지금들을 한데 모아 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게 만들었다. 나 역시 이 여정이 지금까지 내 삶에 일어났던 일 중에 가장 특별한 여정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처럼 살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광채는 내가 평생에 걸쳐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처럼 살아오지 않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내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것. 내가 즐겁다고 느끼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나의 것. 나. 나. 당시에는 그 모든 것을 잊은 채로 살아가고 있었음이 틀림없었으리라. 그러지 않고서는 그때 내가 왜 나로서 사는 것을 그토록 힘들어 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므로.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만큼은 그때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되찾아야 했다. 무엇을 잃어 버렸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까지 이뤄 놓은 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아무 감흥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내가 인정하는 기쁨의 순간들, 사람들이 인정하는 감격의 순간들은 모두 기억 저편의 먼지 쌓인 기억 보관함에 처박아 둔 채 내가 해 내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해 살아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싶었는지, 대관절 무엇 때문에 이 먼 곳으로 혼자 떠나오게 되었던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방황만 하고 앉아 있을 순 없단 생각에 내가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갔다. 새로 이사갈 집을 알아본다든지, 퇴근하고 야외 러닝을 다녀오는 식으로.
타이밍 좋게도 시드니 북서 쪽 외곽에 위치한 지역의 하우스 집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유일하게 인스펙션을 다녀온 곳이었는데 나 포함 세입자 후보 3명 중에서 나에게 그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건 분명히 기회다. 새로이 터를 잡고, 다시금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회.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이사 가기로 한 토요일, 그러니까 그 주의 월요일에 수정된 이력서를 출력하고 그 지역으로 넘어가 근처 쇼핑센터에 있는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돌렸다. 젤라또샵에서 여전히 적은 쉬프트가 주어지고 있던 터라 최소 주 35시간 이상은 일하고 싶었던 나는 안 그래도 빨리 일을 하나 더 구하고 싶었던 참이었다. 이번에도 이력서를 돌린 다음 날 두 곳에서 연락이 왔고 처음 때처럼 하나는 인터뷰, 다른 하나는 트라이얼을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주 금요일에 트라이얼을 본 가게에서 그날 바로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하는, 내가 원하던 모든 조건을 맞춘 웨이트리스 일을 구하게 되었고, 이때를 기점으로 나의 워홀은 본격적으로 두 번째 장을 맞게 된다.
처음부터 드라마틱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트라이얼 때도 느꼈듯이 그곳에서의 웨이트리스 일은 여태 해 온 일들에 비하면 놀이 수준으로 일 강도가 낮았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도 한국인에게 매우 친화적인 분위기라 그들의 집단 속에 금방 섞여 들었다. 여전히 영어 사용에 미숙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서 알아서 잘 처리해야 하는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투잡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삶이 지루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일도 두 개나 있어서 쉬프트 걱정할 필요도 없고 사람도 5명밖에 살지 않는 -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한 달 반 동안 묵었던 집은 14명이 같이 살았다 - 아늑한 2층 주택으로 이사 와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시달릴 일도 없어졌는데 이번엔 도대체 왜, 뭐가 문제였을까. 이 정도면 내가 안정적인 상황을 못 견뎌 하는 거 아닐까?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돌이켜보면 내게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안정적인 상황을 못 견뎌 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외국에서의 홀로서기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었다. 비단 나만 겪는 일은 아닌 듯했다. 이후에 더욱 친해져 호주를 떠나기 전에 함께 타즈매니아 여행까지 같이 다녀온 친구는 당시 나에게 자신이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기도 했었으므로. 외국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이곳에서 자신의 터를 잡고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에게 길을 묻다가 스몰톡으로 대화가 이어지고, 그러다 눈물을 보이며 고민 상담을 하게 되던 순간들. 친구들을 만나면 매번 “나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곳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여기에서 지금 행복하지도 않아” 하며 홀로 불안해하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그곳에 뿌리 내리는 과정이었음을 지금은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다.
호주에 온 지 두 달이 넘어갈 무렵, 나는 서서히 나를 되찾아 갔다. 영어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주변에 사람들도 많고 여기저기 잘 놀러 다니는 사람이 당장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래가 아닌 오늘에 집중해서 살아보기로 다짐한 덕분이었다. 내가 그리는 미래가 아닌, 지금 온몸으로 느끼는 현재에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고 있었던 꿈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났고, 나는 굶주린 사자처럼 빠른 속도로 그것들을 모두 현실로 재현해 나갔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말 말 그대로 친한 친구와 재밌게 노는 하루들을 보내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대충 챙겨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따라하는 레시피를 참고해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스페인 친구가 알려 주었던 운동 클래스 어플을 깔고 필라테스와 Sassy dance fitness, 줌바 수업을 들으며 새로운 운동에 대해 배우고 새로운 헬스장에도 가 보면서 다양한 환경에서 주기적으로 땀을 흘렸다.
그렇게 호주에 온 지 세 달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더 이상 그 어느 순간에도 마음이 괴롭지 않았다. 더는 아침에 심장이 빨리 뛰지 않았고, 불안에 잠식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그리하여 내일 아침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오늘 일어난 수많은 것들에 행복을 느끼고, 내일 일어날 또 다른 수많은 일들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일을 더 잘하게 되었고, 영어로 듣고 말하는 것이 점점 편해졌으며, 많은 것들을 경험하는 만큼 친구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폭도 넓어졌다. 물론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일들도 있었다. 여전히 어떤 식으로 장을 봐야 하는지 몰랐고, 요리하는 데 억겁의 세월이 걸리는 듯했으며, 내가 만들어 낸 음식의 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갔고, 매일 모든 분야에서 어제보다 더 나은 나를 발견하며 종종 자기 효능감만으로도 모든 것을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도취되었다.
온전한 평안을 얻었다고 느끼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해 준 말이 있다. 그 말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내 머릿속을 맴돌던 말이었는데, 그날은 태어나 처음으로 하우스 파티에 참여한 날이었다. 나는 지인의 지인으로서 참여한 자리였는데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서 그 집에 모인 모든 이들과 빠르게 친해졌었다. 워낙 리액션이 크고, 활발한 성격 덕분이었으리라. 그렇게 늦은 밤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또 들었다. 그곳에는 일본인 4명과, 필리핀계 호주인 1명, 그리고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맞다면 인도네시아계 호주인 1명 이렇게 총 6명의 외국인이 있었다. 대개는 일본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일본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일본 애호가들 사이 유일한 한국인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 사귀는 과정에서 국적은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들 분위기 속으로 들어갔고 종종 그들이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나는 곧장 무슨 뜻이냐며 붙임성 있게 물어 봤다. 외국인들과 있으면 최대한 모든 대화 내용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심에서 나온 고집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했던 일본말 중 내가 아는 단어도 있었다. きらり. 나는 후지이 카제의 노래를 참 좋아하는데 그의 노래 중에서 이 단어가 제목인 것이 있던 덕분이었다. 키라리. 반짝인다는 뜻이다. 당시에 3명의 일본인은 쇼파에 누워 있고 나는 다른 한 명의 일본인과 서서 엄청 열심히 대화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걸 가만 보던 그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일본어로 대화를 시작했고, 그 옆에 있는 두 명은 실로 그러하다며 동의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었다. 일제히 내게로 향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You're shining now.(너 지금 빛나고 있어.)”
나는 당시에 젤라또샵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을 때였고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많이 들던 때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4년 동안 일본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해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꿈 하나로 하던 일을 모두 접고 4년 전에 호주에 왔다는 친구는 그의 말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내가 정말로 대단하다고 했다. 내 영어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말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영어를 너무 잘해서 놀랐다고 답했다. 그들은 그 어린 나이에 - 그들은 최소 나보다 6살이 많았고 최대 20살까지 차이 나기도 했다 - 새로운 나라에 와서 적응하며 살고 있는 내가 무척 용감한 사람이고 그런 내가 얼마나 부러운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이 스물한 살일 때는 무엇을 했는지, 지금은 몇 살인지도 덧붙이면서. 나는 그들이야말로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고국에서 미래가 보장된 삶을 살다가 새로운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여정이 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나를, 나는 그들을 빛나는 존재로 여겼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강물이 우리를 향해 부서진 햇빛으로 넘실거리는 것을 아주 오랫동안,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의 존재로서만 증명할 수 있는 빛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