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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적인튀김요리 Nov 23. 2021

사진으로 걷는 올레18코스

제주도민의 언제 포기할지 모르는 올레길 돌파기 (9)


1. 오랜만에 걷는 올레길. 우주를 낳고는 처음 걷는 길이다. 시간적 여유가 부족한 탓에 시작하기에 가까운 18코스를 택했다. 덕분에 올레길의 시작은 잠잠하다. 익숙한 길이다. 익숙한 길에서는 걸음이 멈추질 않는다. 함께 걷는 이의 안부를 묻고 답하며, 근황을 묻고 답하며 쉼 없이 걷는다. 올레길엔 두 가지 매력이 있는데 하나는 제주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걷는 것이다. 걷는다는 건 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는 일로 대단히 간단한 일이면서도 걷는다는 건 움직임 속에서 머리를 어지럽혔던 움직임을 덜어내는 대단히 복잡한 일이기도 하다. 연말이 다가오며 1년간 어질러진 마음과 머리는 걸음과 함께 차곡차곡 정리가 된다. 그럴 땐 이것저것 보기보다는 그저 걷는 것이 좋다. 그런 점에선 익숙한 제주가 있는 18코스는 적절한 선택이다.


2. 어째 생김새가 영 투박한 의자지만 업사이클링으로 탄생했다는 출생의 비밀을 알고서는 다르게 보인다.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늘,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까 노심초사하는데 환경도 개중 하나다. 자연을 늘 당연하게 끼고 살았던 내게 환경은 걱정한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그 모습이 변하고 흉흉한 사건들만 오르내리는 제주에서 자연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환경은 걱정거리임을 매일 확인한다. 업사이클링 의자 하나가 세상을 바꿀 순 없겠지만 업사이클링 의자를 본 사람들이 영감을 얻는다면 세상을 바꾸는 일도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이다.


3. 그런 점에서 해가 갈수록 어질러지는 제주항은 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오랜만에 올라 내려다 본 제주항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우주비행장과 같아서 그 모습이 대단히 어색하고 기이하다. 바다에 시멘트 선을 긋는 일이 바다에 침몰한 유조선이 남기는 기름띠와 다를 것이 무언가 고민해 본다.


4. 추운 날씨에도 삼양 바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떠 있다. 난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살면서도 바다에서 노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난 바다에 뛰어드는 쪽이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쪽이었다. 내심 용기 있는 사람들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부럽지 않았다. 이렇게 멀리서 저들의 파도타기를 응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같이 걷는 친구의 제안으로 잠시 걸음을 멈춰 바다에 앉았다. 바다는 늘 그렇듯 내 질문에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한다.


5. 길고양이 급식소. 급식소 덕분인지 이 동네 고양이들은 죄다 살이 통통하고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 듯하다. 이 길고양이 급식소를 대뜸 차지하고 있는 녀석도 덩치가 상당하다. 급식소 곁에서 나른나른 졸고 있는 길고양이들이 귀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괘씸하지도 않았다.


6. 해안가를 중심으로 편성된 올레길에는 오래전에 쓰던 연대가 많다. 그리고 그 연대에 오르면 좋은 경관을 마주한다. 가장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위험 신호를 감지해야 하는 것이 연대의 역할이었으니까 연대의 경관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다. 문득 연대를 지켰을 사람들이 저 멋진 바다를 두려워했을까, 좋아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카맣게 변하는 바다를 두려워한 쪽이었을 것 같았다.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바다의 검은 면보다 밝은 면을 보고 자랐다.


7. 닭머르. 이런저런 일로 지나간 적은 많았지만, 눈여겨 본 적 없었던 곳인데 객이 많아 이제야 눈길이 갔다. 갈대가 흐드러진 곳에는 연인, 가족 할 것 없이 사진 찍는 이들로 붐볐다. 우리도 그제야 사진을 하나씩 남겼다. 유독 사진이 없었던 날이다. 사진 찍을 시간이 없었는지, 걷는 것이 중요했는지, 올레길에 시큰둥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8. 해가 넘어갈 즈음 마무리된 올레길. 다음을 약속하고 싶지만 기약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아직 걸을 길도 많이 남았고 시간도 많이 남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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